
[전문가 칼럼] 기술 주권의 대전환, ‘소버린 AI’가 만드는 새로운 세계 질서
2025년 4월, 한국 AI 업계를 뒤흔든 논쟁이 있었다. 네이버클라우드 김유원 대표가 던진 한 마디가 시작이었다. 그의 “외산 기술을 들여와 국산 상표를 붙인다고 소버린 AI(Sovereign AI)가 되는 건 아니다”라고 한 이 발언은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고 AI 서비스를 준비하는 KT를 겨냥한 것이었지만, 단순한 기업 간 경쟁을 넘어 한국이 직면한 기술 주권의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재명 정부는 최근 네이버의 하정우 AI센터장을 AI 미래기획수석으로 임명했다. 하 수석은 취임 전부터 “소버린 AI는 특정 기업의 어젠다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어젠다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그가 말하는 소버린 AI는 단순한 기술 국산화가 아니다. “정부는 육수를 제공하고, 민간은 음식을 만든다”는 그의 비유처럼, 데이터부터 인프라, 알고리즘, 윤리, 규제까지 포괄하는 총체적 AI 생태계를 의미한다.
소버린 AI: 21세기 기술 주권의 새로운 정의
소버린 AI의 개념이 글로벌 화두로 떠오른 것은 2022년 11월 챗GPT 출시 이후였다. 하지만 결정적 계기는 2024년 2월 두바이 세계정부정상회의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모든 국가는 자체 지능 생산 능력을 가져야 한다”며 “데이터가 들어가면 지능이 나오는 ‘AI 팩토리’가 전력망이나 통신망처럼 필수 국가 인프라가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었다.
미국의 국제 문제 전문 싱크탱크인 대서양 협의회(Atlantic Council)는 소버린 AI를 ‘국가나 정치 연합의 법과 제도적 틀을 준수하며, 맥락적으로 적절하고 안전하며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AI 개발’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소버린 AI를 구현하기 위한 네 가지 핵심 축을 설명했다. 첫째는 합법성으로 현지 법규를 준수하는 것이고, 둘째는 경제적 경쟁력으로 국내 경제를 위한 가치 창출이며, 셋째는 국가 안보로 핵심 인프라를 보호하는 것이고, 넷째는 가치 정렬로 국가의 정치적·문화적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다.
소버린 AI가 부상한 배경에는 복합적인 동기가 작용했다. 지정학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기술 기업들의 AI 지배에 대한 우려가 컸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 등의 미국 기업들과 바이두, 알리바바와 같은 중국 기업들이 전 세계 AI 시장을 양분하는 상황에서 각국은 기술 종속이 곧 국가 주권의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경제적 동기도 강력했다. 글로벌 컨설팅그룹 맥킨지는 AI가 2040년까지 연간 15.5조 달러에서 22.9조 달러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런 막대한 부가 소수 기업과 국가에 집중된다면, 나머지 국가들은 영원한 디지털 식민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데이터 주권 문제는 더욱 첨예했다. 유럽연합(EU)의 일반 개인정보 보호법(Gend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 이하 ‘GDPR’)은 이미 데이터 현지화의 선례를 만들었고, 각국은 자국민의 데이터가 외국 기업의 서버에 저장되고 처리되는 것이 단순한 프라이버시 문제를 넘어 국가 안보의 문제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문화적 동기도 무시할 수 없었다. 미국 영어 데이터로 훈련된 AI 모델들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각국은 자국의 언어와 문화, 가치관이 AI 시대에 소멸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싱가포르의 시라이언(SEA-LION), 대만의 타이드(TAIDE, 태국의 타이푼(Typhoon) 등의 대형언어모델(LLM)은 모두 이런 문화적 위기의식에서 출발했다.
글로벌 AI 주권 전쟁의 세 가지 모델
이제 글로벌 AI 주권 전쟁에 나선 주요 국가들의 방법을 확인해 보자.
우전 미국의 AI 전략은 겉으로는 자유방임주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교하게 계산된 시장 주도 모델이다. 정부는 직접 나서지 않지만, 환경을 조성하고 전략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2024년 기준으로 전 세계 AI 투자의 67%가 미국에 집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 정부의 역할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기초 연구에 대한 막대한 투자다. 국가 AI R&D 전략 계획을 통해 대학과 연구소에 수백억 달러를 지원한다. 둘째는 전략적 산업 정책이다. 칩스법은 단순히 반도체 공장을 미국에 유치하는 것이 아니라,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를 장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셋째는 안보를 명분으로 한 기술 통제다.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수출 금지는 경쟁국의 AI 개발을 원천 차단하려는 전략이다.
미국 모델의 강점은 속도와 규모다. 정부 관료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빠르게 혁신할 수 있고, 벤처캐피털의 막대한 자금이 위험한 도전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약점도 있다. 기업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많은 미국 AI 기업들이 중국 시장을 포기하지 못해 정부와 갈등을 빚고 있다.
반면 중국의 AI 전략은 미국과 정반대다. 당과 정부가 모든 것을 기획하고 지휘하는 ‘전국가적’ 접근이다. 2017년 발표된 ‘신세대 AI 발전계획’은 2030년까지 AI 분야 세계 1위가 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담고 있다. 이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구체적인 로드맵과 막대한 자금이 뒷받침된 국가 전략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미국의 제재를 극복하는 방식이다. 최첨단 칩을 수입할 수 없게 되자, 중국은 두 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하나는 자체 개발이다. 화웨이의 어센드 칩은 처음엔 조롱받았지만, 2024년엔 엔비디아 GPU 성능의 70%까지 따라잡았다. 다른 하나는 효율성 혁신이다. 딥시크가 단 560만 달러로 경쟁력 있는 모델을 만든 것은 제약이 오히려 창의성을 자극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중국 모델의 장점은 일사불란한 실행력이다. 정부가 결정하면 모든 자원이 집중된다. 30개 이상의 도시에 대규모 컴퓨팅 센터를 건설하고, 100개 이상의 LLM이 경쟁하는 것도 이런 총력전의 결과다. 하지만 단점도 명확하다. 정부 주도의 비효율성, 창의성 부족, 그리고 국제적 고립이다. 중국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서방 국가들은 안보를 이유로 채택을 거부하고 있다.
한편 EU는 기술도 자본도 부족하지만, 5억 명의 인구로 구성된 부유한 시장과 규제 권력을 무기로 독특한 전략을 구사한다. 2024년 8월 발효된 EU AI법(AI Act)은 세계 최초의 포괄적 AI 규제법으로, AI 시스템을 위험도에 따라 4단계로 분류한다. 일부 AI는 아예 금지되고, 고위험 AI는 엄격한 요구사항을 충족해야 하며, 모든 AI는 투명성 의무를 진다.
이 법의 진짜 힘은 역외 적용에 있다. EU 시장에서 사업하려는 모든 기업은 출신 국가와 관계없이 이 법을 따라야 한다. 위반 시 전 세계 매출의 7% 또는 3,500만 유로 중 높은 금액의 벌금이 부과된다. 이로 인해 GDPR이 전 세계 데이터 보호 표준이 된 것처럼, AI법도 글로벌 표준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EU 모델의 강점은 가치와 신뢰다. ‘인간 중심 AI’, ‘신뢰할 수 있는 AI’라는 슬로건은 많은 국가들, 특히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기업들도 EU 인증을 받으면 신뢰성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약점은 속도다. 까다로운 규제는 혁신을 늦추고, 파편화된 시장은 규모의 경제를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국의 소버린 AI: 꿈과 현실 사이
이재명 대통령의 100조원 AI 투자 공약은 한국을 AI 강국으로 도약시키겠다는 야심찬 비전을 담고 있다. “국민들이 전자계산기를 쓰듯이 챗GPT를 무료로 쓸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은 AI 민주화의 이상을 보여준다.
최근 임명된 하정우 AI 미래기획수석이 제시하는 전략은 명확하다. 정부는 인프라를 제공하고, 민간은 혁신을 주도하는 역할 분담이다. 정부는 GPU 5만 개 확보, 국가 AI 데이터 집적 클러스터 조성, AI 고속도로 구축, AI 인재 10만 명 양성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추진 중이다.
이런 정부의 의지는 최근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2025년 6월 시작된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정부는 7월 21일까지 사업자를 모집해 8월에 5개 팀을 선정할 예정이며, 선정된 팀에게는 최신 GPU 1만 장을 포함한 집중 지원을 약속했다. 이는 정부가 단순한 구호를 넘어 실질적인 지원에 나섰다는 신호로 보인다.
하지만 현실적인 과제들은 여전히 산적해 있다. 2025년 예산 편성 과정에서 AI 관련 예산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기획재정부는 국가채무가 이미 1,200조원을 넘어선 상황에서 대규모 재정 투입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수익 회수가 불확실한 첨단산업 투자에 대한 우려가 크다.
더 큰 과제는 민간 투자 유치다. 정부는 100조원 중 상당 부분을 민간에서 조달할 계획이지만, 민간은 정부의 확실한 의지와 초기 투자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정부가 먼저 움직여야 민간도 따라온다”는 것이 업계의 일관된 요구다.
기업들의 생존 전략
정부의 소버린 AI 프로젝트 공모를 앞두고 한국 기업들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바늘구멍’으로 비유되는 5개 팀 선정을 위해 각 기업은 협력관계 구축과 차별화 전략으로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LLM 기업과 AI 반도체 업체 간의 전략적 제휴다. SK텔레콤은 AI 팹리스 업체 리벨리온과 손잡고, 리벨리온의 NPU ‘아톰’을 자사 LLM ‘A.X 4.0’에 접목하는 테스트를 진행 중이다. 업스테이지는 퓨리오사AI와 협약을 맺고 자체 LLM ‘솔라’를 퓨리오사의 차세대 NPU ‘레니게이드’에 최적화할 계획이다. 코난테크놀로지도 리벨리온과 협력해 ‘코난 AI 스테이션 서버’를 공개했다. 업계는 이를 “LLM과 NPU 업체 간의 협력은 정부의 의도를 파악한 정석적 공략법”으로 평가한다.
네이버와 LG AI연구원은 ‘양강’으로 꼽힌다. 네이버는 하이퍼클로바X의 경량화 버전인 ‘HyperCLOVA X Seed’를 2025년 4월 오픈소스로 공개하며 생태계 확장에 나섰다. 20년간 축적된 네이버 검색, 블로그, 카페 데이터를 활용해 한국 특유의 언어 습관과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AI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공공 부문으로의 확산도 시도 중이다.
LG AI연구원은 최근 국내 첫 추론형 AI ‘엑사원 딥’을 선보이며 기술력을 과시했다. 그룹 계열사 현장에 온디바이스 형태로 모델을 탑재하고, 임직원용 AI 에이전트 도입을 추진하는 등 산업 현장 적용에서 강점을 보이고 있다. 적은 개발비로도 글로벌 수준의 성능을 달성한 효율성이 주목받고 있다.
KT는 독특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와의 파트너십을 유지하면서도 자체 역량 강화에 나섰다. GPT-4o 기반 ‘GPT-K’ 출시 시기를 조정하고, 자체 LLM ‘믿음’의 차기 버전 성능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핵심은 엔진이 아니라 데이터 통제권”이라는 기존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독자 모델 개발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SK텔레콤은 ‘AI 피라미드 2.0’ 전략을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 울산 대형 데이터센터 구축과 함께 독일 도이치텔레콤을 비롯해 이앤그룹, 싱텔그룹, 소프트뱅크 등과 글로벌텔코AI얼라이언스를 결성해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또한 리벨리온과의 협력으로 국산 AI 반도체 생태계 구축에도 앞장서고 있다.
삼성전자는 온디바이스 AI라는 차별화된 길을 걷고 있다. ‘가우스’ 모델을 갤럭시 스마트폰에 탑재해 인터넷 연결 없이도 작동하는 AI를 구현했다. 삼성SDS는 생성형 AI 플랫폼 ‘패브릭스’로 금융과 공공 부문에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며, 기업용 AI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카카오는 오픈AI와 전략적 제휴를 맺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체 LLM ‘카나나’의 한국어 성능을 적극 홍보하고 있다. ‘오케스트레이션 전략’으로 자체 모델과 글로벌 모델을 유연하게 활용하며, 포털 서비스 ‘다음’을 별도 법인 ‘AXZ’로 분사해 AI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업계의 엇갈린 전망
한국의 소버린 AI 전략에 대해 업계의 의견은 크게 갈리고 있다.
지지하는 쪽에서는 필연성을 강조한다. 유럽이 이미 조 단위 투자로 AI 독립을 추진하고 있고, 일본도 전용 모델을 만드는 등 세계 각국이 저마다의 소버린 전략을 구체화하는 상황에서 한국도 서둘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월드 모델’ 같은 차세대 AI 개념은 아직 글로벌 시장에서도 초기 단계이므로, 한국이 기술 선도국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안보 측면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미국이 AI를 경제가 아닌 안보 관점에서 접근하기 시작했고, AI 역량의 유무가 곧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현재는 누구나 선진국 AI를 사용할 수 있지만, 이런 개방성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으므로 자체 생태계 구축이 필수라는 주장이다.
반면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일각에서는 현재의 GPU 집중 투자가 2-3년 후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전략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앞으로는 GPU보다 메모리가 중요해지고, 메모리 안에 GPU 기능이 통합되는 시대가 올 것이므로,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와 알고리즘에 투자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정부의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프로젝트는 이런 논쟁 속에서 하나의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5개 팀 선정과 GPU 1만 장 지원이 실제로 얼마나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질지, 그리고 LLM 기업과 AI 반도체 업체 간의 협력관계 구축이 진정한 생태계 구축으로 발전할지가 한국 소버린 AI의 미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2030년, 소버린 AI 앞에 놓인 세 갈래 길
그렇다면 향후 소버린 AI는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가? 현재 3가지 정도의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 있다.
첫 번째이자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세계가 몇 개의 AI 블록으로 나눠지는 미래다. 미국 블록, 중국 블록, EU 블록이 각각 폐쇄적 AI 생태계를 구축하고, 블록 간 데이터와 기술 교류는 극도로 제한된다. 이미 시작된 미중 기술 전쟁이 AI 전 분야로 확대되는 것이다.
현재의 징후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AI 칩 수출을 금지하고, 중국은 데이터보안법으로 자국 데이터의 해외 이전을 차단했다. EU는 자체 AI법으로 독자적 규범을 만들며 미국 빅테크를 견제한다. 향후 각 블록은 자체 기술 표준을 개발하고, 인력 이동까지 통제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시나리오에서 한국 같은 중간 국가들은 고통스러운 선택을 강요받는다. 미국 기술을 택하면 중국 시장을 잃고, 중국과 협력하면 서방의 제재를 받는다. 현재 반도체 산업에서 겪는 ‘샌드위치’ 딜레마가 AI 전 분야로 확대되며, 기업들은 시장별로 완전히 다른 AI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소수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사실상 모든 AI 인프라를 장악하는 미래다. 각국의 주권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하고,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같은 기업들이 실질적 통제권을 행사한다.
이 시나리오는 이미 부분적으로 현실이 되고 있다. 엔비디아가 AI 칩 시장의 80%를 독점하고, 클라우드 빅3가 전 세계 AI 인프라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각국은 ‘주권 클라우드’라는 이름의 패키지 상품을 구매해 형식적 주권을 유지하지만, 핵심 기술과 실질적 통제권은 여전히 빅테크가 쥐게 된다.
한국의 KT가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은 것처럼, 대부분의 국가는 비용과 기술력을 이유로 빅테크와의 협력을 선택한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디지털 식민지화’라는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 AI 발전 방향, 윤리 기준, 심지어 각국 AI 정책까지 소수 기업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마지막 세 번째는 각국이 진정한 AI 주권을 확보하면서도 국제 협력이 가능한 이상적 미래다. 이것이 바로 소버린 AI 운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다. 각국이 자국 언어와 문화에 최적화된 독자적 AI 생태계를 구축하되, 표준화된 프로토콜을 통해 필요시 협력하는 모델이다.
마치 오늘날 각국이 독립적인 인터넷 인프라를 운영하면서도 글로벌 네트워크로 연결되듯, AI도 ‘연합형 주권’ 체제를 구축한다. 한국은 고도로 발달한 한국어 AI를 보유하고, 일본은 일본 문화에 특화된 AI를, 인도는 22개 공용어를 이해하는 AI를 운영한다. 이들은 필요시 표준 API를 통해 소통하고 협력한다.
이 미래에서는 기술 다양성이 보장되고, 문화적 정체성이 보존되며, 어느 한 국가나 기업이 과도한 권력을 갖지 못한다. 네이버가 한국어 AI로 사우디에 수출한 것처럼, 각국은 자신의 강점을 살린 AI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한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가 실현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막대한 개발 비용, 기술 표준화의 어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 간 신뢰 구축이 필요하다. 현재의 지정학적 긴장 속에서 이런 협력적 미래가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현실은 아마도 이 세 시나리오가 복잡하게 얽힌 형태가 될 것이다. 안보와 금융 같은 핵심 영역에서는 블록화가, 일반 비즈니스 영역에서는 빅테크 지배가, 그리고 문화와 언어 영역에서는 부분적 주권이 공존하는 ‘다층적 현실’이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선택은 이런 복잡한 현실 속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다. 완전한 독립도, 완전한 종속도 아닌,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면서도 실용적 협력을 추구하는 길. 그것이 100조원 투자가 진정으로 목표해야 할 방향일 것이다.
주권 없는 AI, AI 없는 주권
소버린 AI는 21세기 국가 경쟁력의 새로운 척도가 되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생소했던 이 개념은 이제 70개국 이상이 추진하는 국가 전략이 되었고, 엔비디아만 해도 2024년 각국 정부로부터 100억 달러의 소버린 AI 관련 매출을 올렸다.
하지만 진정한 AI 주권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자국산 모델을 갖는 것일까, 아니면 데이터를 통제하는 것일까? 어쩌면 답은 둘 다이면서 둘 다 아닐지도 모른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이 약속한 100조 원(약 770억 달러)은 거액이지만,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AI에 쏟아붓는 연간 투자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마이크로소프트 한 곳만 2024년 AI 인프라에 500억 달러를 투자하고, 메타는 400억 달러를 쓴다. 주요 빅테크 기업들의 AI 관련 투자를 합치면 연간 2,000-3,000억 달러에 달한다.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추진하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하나만 5,000억 달러다. 이런 규모의 경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다. 필요할 때 자체 AI를 쓸 수 있고, 필요하면 글로벌 AI도 활용할 수 있는 유연성.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국민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협상력. 그리고 무엇보다 AI 시대에도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철학.
정답은 없지만 우리는 선택해야 할 시점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한다. AI의 국적을 묻는 시대,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이 글을 쓴 변형균 퓨처웨이브 대표는 작가이자 미래경영 전문가로, 2015년부터 KT그룹의 AI·빅데이터 전략 수립을 시작으로 통신·의료·금융 분야 사업 혁신과 신사업 추진 경험을 갖고 있는 AI·데이터 트랜스포메이션 전문가다. KT에서 데이터 거버넌스, 빅데이터 기획, 데이터 트랜스포메이션, AI·빅데이터 서비스 및 디지털·바이오헬스 사업을 총괄하는 상무로 일했으며, BC카드에서 AI빅데이터본부장과 데이터사업본부장을 역임했다. 인간과 기계, 인간과 AI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AI 기술 혁명의 시대에 리더는 어떤 리더십과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는지,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인간이 아닌지에 대한 관심이 많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