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칼럼] 생명공학 분야에서 불어오는 칩의 혁명, ‘랩온어칩’
바야흐로 인공지능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현 시점에서, 엔비디아는 AI 시대를 이끄는 주인공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반도체를 이용한 그래픽 처리 장치(Graphic Processing Unit, GPU), 소위 ‘칩(Chip)’을 이용해 만든 이 회사의 제품은 막대한 연산을 감당해야 하는 데이터 센터의 수요에 부응했고, 덕분에 엔비디아는 전 세계 시가총액 1위에 등극했다. 이렇게 엔비디아, 그리고 엔비디아가 설계한 칩은 AI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반도체의 등장과 칩의 발전이 지난 50년간 정보화 사회를 이끈 핵심 동력이긴 하지만, 불과 10년 전만 하여도 엔비디아가 발표하는 칩에 모든 사람이 열광하는 장면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엔비디아가 주목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인공지능에 대한 시대적 요구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미세유체공학이 일궈낸 혁신, 랩온어칩
그런데, 생명공학 업계 또한 ‘칩’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왔다. 그 주인공은 바로 칩 위의 실험실로 불리는 ‘랩온어칩(Lab-on-a-chip, LoC)’이다.
흔히 마이크로유체칩(Microfludic chip)이라고도 불리는 랩온어칩은 손바닥보다 작은 마이크로칩의 공간 내에 하나 이상의 실험실 기능을 통합한 장치다. 생물학이나 화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실험을 빠르게, 최소한의 시료로, 자동화된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술이다.
서울대학교 마이크로·나노공학 박사이자 랩온어칩 기반 소형 진단 플랫폼 기업 스몰머신즈를 설립한 최준규 대표는, “랩온어칩은 ‘반도체 미세가공기술’ 및 ‘미세유체공학’의 발전에 힘입어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되었고, 현재는 하나의 소형 칩에 여러 실험 절차를 통합하여 정교한 생화학 분석도 수행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랩온어칩을 이용하면 소량의 검체만으로 여러 바이오마커를 모니터링하거나 질병을 빠르게 진단할 수 있다. 이러한 잠재력으로 인해 미세유체공학은 2001년 ‘MIT Technology Review 10대 기술’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미세유체공학’은 마이크로미터 단위의 미세 환경에서 유체(fluid)를 조작하는 공학 기술로, 랩온어칩의 구현에 있어 핵심이 되는 기술이다.
랩온어칩의 아이디어가 처음 선보인지 어느덧 30년이 지났지만, 초기의 기대만큼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미세유체공학과 함께 질병 진단의 판도를 혁명적으로 뒤바꿀 것이라는 약속이 즉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재조명
코로나19 팬데믹은 랩온어칩의 잠재력을 세상에 다시금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질병의 신속한 진단이 요구되는 현장에서 미세유체기술을 활용해 만들어진 신속 진단 키트가 감염된 환자를 빠르게 치료할 수 있도록 돕고,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이 증명됐기 때문이다.
최 대표는 이러한 방식으로 랩온어칩이 현장 중심 정밀 검사나 ‘절대 정량’ 데이터 제공, 네트워크 연결성이라는 세개의 축을 통해 진단 의학의 지형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고 말한다. 코로나19 진단 키트를 통해 중증 환자를 빠르게 분류했던 것처럼, 랩온어칩을 이용한 현장 진단 역량이 강화되면 중증 응급 환자의 처치에 소요되는 총 시간(Turn Around Time, TAT)이 단축되고, 바이오마커의 지속적 모니터링을 통해 조기 경고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MFA(The Microfluidics Association)와 미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에 의해 랩온어칩의 글로벌 표준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 표준화 작업이 이뤄진다면, 랩온어칩의 성능, 설계, 호환성, 안전성 등을 전세계적으로 통일된 기준에 맞춤으로써, 상용화와 확산, 신뢰성 확보를 가능하게 해, 오픈 이노베이션을 기반으로 한 플랫폼 비즈니스가 확대되기 위한 기반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최 대표는 “표준화가 완료된다면, 감염성 질환, 종양 마커, 만성 질환 패널 등 특정 기업이 가진 검출 능력을 범용 칩에 마치 ‘앱(APP)’처럼 탑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사용자는 하나의 표준화된 리더기(Reader)로 다양한 진단을 선택할 수 있고, 데이터 역시 통일된 포맷으로 작성되어 의료 빅데이터 및 AI 분석 파이프라인과 연계가 용이해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미래에는 랩온어칩이 마치 범용 프로세서처럼 구성되면서 대중화의 길로 접어들 것으로 그는 기대하고 있다.
또 하나의 시대적 요구
랩온어칩의 또 다른 가능성은 신약 개발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으로 당연시됐던 동물 실험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다는 것에 있다. 2022년 미국 FDA가 신약 승인을 받기 위해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했던 동물 실험 조항을 철폐한 데 이어, 단일클론항체 및 기타 약물에 대한 동물 실험 요건 역시 단계적으로 폐지할 계획을 발표했다. 또한 2023년 7월,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는 화장품 동물 실험 금지 보호 및 강화, 화학 물질 관련 법규에서 동물 실험 축소, 동물 사용을 대체하는 접근법의 개발을 목표로 한 로드맵을 강화할 것을 약속하였다.
동물 실험을 대체하는 방법으로는 ‘오가노이드(Organoid)’가 이런 동물 실험을 대체하기 위한 중요한 기술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오가노이드는 줄기세포를 이용하여 체외에서 배양한 실제 장기와 유사한 구조와 기능을 가진 세포 덩어리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인간의 특정 장기가 수행하는 역할을 어느 정도 재현해 낼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약물이 인체 내에서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오가노이드 기술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고려대학교 기계공학부 교수이자, 미세유체시스템 기반 진단 및 인체 모사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는 정석 교수는 “오가노이드가 특정 장기 세포를 만들 수는 있지만, 세포를 3차원으로 재구성하여 주변의 혈관·신경 등의 미세환경을 공학적으로 조성하기에는 아직 많은 제약이 있다”며, 이때 랩온어칩이 오가노이드의 접근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칩을 이용해 구조적 환경을 조성하고, 거기에 오가노이드를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인체의 장기를 더 잘 모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지아 공과대학교 교수이자, 미세유체역학 기술을 기반으로 한 바이오테크 기업인 멥스젠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용태 교수 역시, 이러한 랩온어칩의 미세유체기술과 오가노이드가 결합한 ‘오간온칩(Organ-on-chip)’의 수요가 커질 것으로 전망하며, 해당 기술이 신약 개발과 진단 의학에 큰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는 “오간온칩은 사람의 몸 안 환경을 훨씬 정밀하게 모사할 수 있어 약물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할지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으며, “오가노이드와 오간온칩을 이용하면 전임상 단계에서 효율적으로 후보 물질을 거를 수 있어 신약 개발의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정 교수 또한 “조직이나 질병과 관련된 모든 현상은 마이크로 스케일이 더 정확하다”며, “규모가 작으므로 세포의 양도, 실험에 사용되는 약품도 절약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FDA 승인을 받은 소아 뇌종양 치료 약물은 6종이나 있지만, 여전히 소아 뇌종양은 불치병으로 간주”된다며, 이 경우 환자마다 약물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므로 개별 환자에게 맞는 최적의 약물 조합인 ‘약물 칵테일’을 설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특정 종양 세포에 대한 약물 반응을 시험하는 기존의 방법으로는 각 환자에 맞춘 약물 조합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문제에서도 오간온칩이 해법을 제시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환자 본인의 세포로 오가노이드를 만들어 칩을 구성하면 개인 맞춤형 치료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인체 내의 복잡한 생리학적 미세 환경을 구현하는 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세포 조직에 혈관 구조를 통합하여 약물 반응을 실험할 때, 단순한 세포 실험에 비해 임상 결과를 훨씬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랩온어칩이 넘어야 할 산
최 대표는 랩온어칩 기술이 대중화되면, 언제 어디서나 소량의 혈액만으로 전문적인 체외 진단 검사를 받을 수 있게 되고, 의료의 패러다임이 치료 중심에서 예방과 예측 중심으로 전환되어 의료비가 절감되는 등, 랩온어칩이 보편 의료의 실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한다. 김 교수 또한 오간온칩이 기존 헬스케어 시스템이 가지고 있던 여러 가지 한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그만큼 랩온어칩(오간온칩)은 잠재력이 많은 기술이다.
오간온칩이 본격적으로 산업에 적용되려면 아직 풀어야 할 문제들이 몇 가지 남아있다. 먼저 김 교수는 오간온칩은 아직 표준화가 부족해, 오간온칩으로 얻은 데이터가 약물 허가나 질병 진단 평가에서 ‘공신력 있는 근거’로 인정받을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다만 오간온칩 기반 데이터의 공인 절차가 명확해지면, 해당 기술이 신약 허가나 질병 진단에 공식적으로 채택되는 사례가 늘어나 앞으로 헬스케어 산업 전반의 표준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더불어 김 교수는 대한민국도 랩온어칩(오간온칩)의 표준화된 가이드라인 절차를 마련하고, 글로벌 진출을 위한 국제 인증과 상호 인정 체계 구축이 시급함을 강조했다. 그는 “동물대체시험법의 개발·보급 및 이용 촉진에 관한 법률안이 21대 국회에서 발의되었지만, 법제사법위원회 계류로 폐기되었고, 22대 국회에서도 아직 상임위에 계류 중인 상황은 제도적 기반 마련이 지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에 대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새 정부에서 신속하게 법안이 통과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현장에서 랩온어칩이 아직은 생소하다는 점도 문제다. 정 교수는 작업자가 익숙한 실험을 통해 신약 후보물질이 효과가 없으면 그 결과를 받아들이지만, 오간온칩과 같이 생소한 도구로 작업한다면 시스템의 문제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며, 이런 인식을 개선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표준화·자동화 시스템이 구축되면, 사용자가 재현성이 높은 모델을 생산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시대로 접어든 지금, 반도체 칩은 국가 전략 자산으로 분류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바이오테크 분야의 랩온어칩 역시 기술의 파급 효과를 고려해 보았을 때,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 기업, 민간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이 글을 쓴 김종성 위니버스 대표는 ‘우리와 세상을 아는 것은 즐겁다’는 것을 알리고자 과학 콘텐츠 제작사 ‘위니버스’를 만들고 동명의 과학 유튜브채널 ‘위니버스’를 운영 중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매체에 칼럼을 쓰며, 강연 활동을 이어가는 중이다. 저서로 <수학은 알고 있다>, <라파엘로가 사랑한 철학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