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스틱의 역설: 기적의 물질에서 지구 최대의 위협으로
문명의 토대는 재료라 할 수 있다. 1900년대 초까지 사용되던 문명의 대표적 재료는 철, 유리, 나무, 세라믹 등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무겁거나, 금속과 화학 반응을 하거나, 깨지거나, 비싸거나, 내구성이 낮거나, 색상을 넣기가 어려웠기에 발전은 더디었다. 이때 혜성처럼 나타나 위의 문제들을 전부 극복함으로써 인류가 진일보할 수 있도록 도운 물질이 바로 합성 플라스틱이었다.
플라스틱은 용해되지 않고, 열에 녹지 않으며, 다른 화학물질과 쉽게 반응하지 않고,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이자, 가벼우면서도 꽤 단단했으며, 성형이 자유로웠고, 궁극적으로 저렴했다. 이런 점에서 플라스틱은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놀라운 물질 중 하나라 해도 과장이 아니다.
플라스틱은 개발 즉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20세기 중반에는 산업 전체를, 더 나아가 문명 전체를 지배했다. 1967년 작 영화 <졸업(Graduate)>에서는 한 중년 남성이 젊은 청년에게 “플라스틱에 위대한 미래가 있다”고 조언하는 장면이 나온다. 플라스틱은 단순한 발명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플라스틱으로 쌓은 문명
그러나 한때 플라스틱으로 위대한 미래를 꿈꿔왔던 인류는 지금 엄청난 골치를 앓고 있다. 플라스틱의 생산량 뿐 아니라 그 증가 추세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2020년 기준 전 세계 플라스틱 생산량은 4억 3,500만 톤에 달한다. 1초에 13.8톤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플라스틱 생산량은 대략 20년마다 두 배 증가하고 있다.
2022년 발표된 논문(Outside the Safe Operating Space of the Planetary Boundary for Novel Entities)에 의하면 플라스틱을 포함한 인류가 만들어내는 인공 물질(Novel Entities)이 지구 생태계의 안전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들은 여러 인공 물질 중에서도 플라스틱의 위험성을 우려하면서, 플라스틱의 생산량, 환경으로 방출되는 플라스틱의 양, 플라스틱 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교란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지구가 위협받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구는 거대하지만, 지금까지 만들어진 플라스틱과 앞으로 만들어낼 플라스틱을 모두 수용하고도 멀쩡할 만큼 크진 않다는 것이다.
유엔환경프로그램에서 인용하고 있는 퓨 자선 신탁(The Pew Charitable Trusts)의 보고서인 ’플라스틱 물결을 깨다(Breaking the Plastic Wave)’는 지금처럼 플라스틱 생산을 계속 유지할 경우, 2040년에는 매년 2,900만 톤의 플라스틱이 바다로 유입되고, 노천에서 소각되는 플라스틱의 폐기물은 1억 3,300만 톤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플라스틱 오염의 대처가 늦어질수록, 미래 세대가 더욱 고통받게 되리란 것은 확실하다.
조용한 희망
플라스틱 오염은 전 지구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국제사회 전체가 참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이해관계 충돌 문제로 해결을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세계는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꾸준한 행보를 이어왔다. 1972년 해양 폐기물의 투기를 규제하는 런던협약을 시작으로, 플라스틱을 포함한 유해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을 규제하는 바젤협약 등 여러 관련 협약이 마련되었다.
특히 2014년부터 2년마다 개최되면서, 현재 193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유엔환경총회(UNEA)는 지금까지 열린 여섯 차례 회의에서 매번 플라스틱 오염과 관련된 결의안을 채택하거나 장관 선언을 통해 발표함으로써 국제사회에 플라스틱 문제를 제기해 왔다. 특히 2022년 개최된 제5차 유엔환경총회(UNEA-5)는 법적 구속력을 가진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결의안을 2024년까지 제정하기로 합의했다.

플라스틱 오염은 모든 이해관계자가 노력하기만 한다면 악화를 막을 수 있는 문제에 속한다. 일례로 플라스틱 오염을 막기 위한 어떠한 방지책도 마련하지 않을 시 2040년에 해양에 유출되는 플라스틱은 2,900만 톤에 달하지만, 2025년부터 즉시 행동에 나서 오염 방지 노력을 기울인다면 그 양은 1,000만 톤보다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세계는 UNEA-5에서 합의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부간협상위원회(INC, Intergovernmental Negotiating Committee on Plastic Pollution)를 출범하여 계약의 초안을 만들고 다섯 차례에 걸쳐 이해당사자 간 세부 사항을 조정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24년 11월, 계획상 마지막 회의인 INC-5가 대한민국 부산에서 열렸다. 하지만 부산에서도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결단이 필요한 때
2024년까지 다섯 번의 회의를 통해 구속력 있는 플라스틱 협약을 체결하기로 한 유엔환경총회의 계획이 연기됐다. 이에 INC-5는 ‘INC-5.1’로 이름이 바뀌었고, 올해 8월 스위스 제네바에게 개최될 예정인 사실상 여섯 번째 회의인 ‘INC-5.2’에서 최종 합의를 시도하게 됐다.
법무법인 율촌의 환경법 및 ESG 전문가인 윤용희 변호사는 “보는 사람에 따라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5차까지 진행된 INC를 통해 각 국가 간의 입장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의 소득이다”라며 “이들 간의 입장 차이를 좁히기 어렵다 보니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탈 플라스틱이라는 대원칙에는 모든 국가가 동의하더라도, 국가의 산업 및 경제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플라스틱과 관련된 문제이므로 각국이 치열하게 다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윤 변호사는 “지금은 각국이 서로의 차이를 얼마나 인정하고 양보해 협약으로 담을지에 관한 결단의 문제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한편 INC-5.2가 열리는 시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지난 1월 ‘미국 에너지 해방(Unleashing American Energy)’이라고 명명한 행정명령을 통해 이전 행정부가 추진했던 기후 및 환경정책을 전면 재검토하기로 결정했고, 2월에는 플라스틱 빨대의 사용을 다시 허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바 있으며, 기업 역시 이런 움직임에 대응하여 친환경 사업을 줄줄이 취소하거나 미루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친환경 정책의 후퇴를 고려하면, 올해 플라스틱 오염에 관한 국제적 규약을 만드는 것은 어려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혹은 합의에 이르게 되더라도 규제안이 대폭 축소돼, 유명무실한 규약이 체결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변호사는 “국제사회는 탈 플라스틱이라는 방향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이는 최근 제45대 미 부통령 앨 고어가 트럼프의 정책에 관해 “재생에너지 혁명은 막을 수 없다”고 발언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탈플라스틱을 포함한 친환경 정책은 “결국 국제 사회가 가야 할 정답”임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속도다. 윤 변호사는 “소비자들의 기업에 대한 친환경, 지속가능 경영에 대한 압박, 그리고 탈 플라스틱 포장재 도입을 촉구하는 지적이 늘어나고 있다”며 소비자들의 적극적인 행동이 기업을 더 빠르게 움직이도록 만든다고 지적했다. 시민들이 정부와 기업의 행보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내는 하나의 거대한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생명공학과 경영학을 공부한 김종성 위니버스 대표는 책과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인 ‘부엔디아 소셜클럽’과 과학 미디어 콘텐츠 제작사인 ‘위니버스’를 설립하고, 동명의 과학 유튜브채널 ‘위니버스’를 운영 중이다. 2020년 한국과학창의재단의 과학융합콘텐츠 개발지원사업을 수행하였고, 과학 콘텐츠 제작 및 과학 문화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2021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상 최우수상, 2022년 정보통신산업진흥원장상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