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만 년 기후 역사의 비밀 알려줄 얼음 조각
스위스 베른 대학교의 박사 과정 연구원 플로리안 크라우스(Florian Krauss)는 장갑을 두 겹으로 낀 채 빠르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레이저를 쏘이면 붉게 빛나는 도금 실린더에 네모난 얼음 조각을 집어넣는다. 이어 뒤로 물러나 이 조각을 기후 데이터로 변환해주는 기계를 놀라운 듯 바라본다.
전선과 게이지로 뒤덮인 기계 안에 든 조각이 단순한 테스트용 조각이 아니라 진짜 남극에서 채취한 100만 년 된 얼음 조각이라면 크라우스는 다음 단계로 추출 용기를 진공 상태로 밀봉하고 150와트 레이저에 전력을 공급해 얼음 조각이 천천히 기체로 승화(昇華)되게 만들 것이다. 이 작업은 얼음 조각의 과거에 얽힌 비밀을 풀어줄 것이다. 즉, 조각 안에 든 이산화탄소 같은 온실가스의 농도를 알려줄 것이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기후 순환에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하는 역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오랫동안 남극 빙하에서 채취한 얼음 조각을 연구해 왔다. 이런 조각을 ‘빙하코어(ice core)’라고 한다. 남극 대륙에는 층층이 쌓인 눈이 수십만 년 동안 축적되고 압축되면서 마치 작은 타임 캡슐처럼 먼 과거의 공기 시료를 공기 방울 형태로 품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공기 방울과 먼지, 물 동위원소 등 얼음 속 다른 성분을 분석해 80만 년 전 온실가스 농도와 온도의 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남극에서 빙하코어를 시추하기 위해 유럽에서 올해로 3년째 추진 중인 ‘비욘드 EPICA(Beyond EPICA)’ 프로젝트는 궁극적으로 150만 년 전 만들어진,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빙하코어를 시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시도가 성공한다면 중기 홍적세 전환기까지 기후 기록을 추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홍적세는 신생대의 마지막 단계로, 오늘날과 같은 기후 상태와 대륙 빙하가 발달했던 시기가 교대로 나타나는 대단히 불안정한 기후로 특징되는 시기다. 흔히 ‘빙하시대(氷河時代)’로 불리기도 한다.
그렇게 오래된 고대 얼음 시추는 그래도 비교적 쉬운 작업일지 모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과학자들은 얼음 속에 갇혀 있던 공기를 추출하는 까다로운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크라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현재 이 작업에 필요한 혁신적이고 새로운 방법을 개발 중이다.
그는 “우리는 얼음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공기 시료에 관심이 있다”면서 “얼음에서 공기를 추출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때 얼음을 녹여서는 안 된다. 이산화탄소는 물에 쉽게 용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공기를 추출하기 위해 개별 얼음층 시료를 분쇄하는 기계적 추출 방법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영하 50°C 이하의 냉동고에 보관되어 있는 비욘드 EPICA의 얼음을 분쇄하는 건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 수 있다. 빙하코어의 맨 아래에 위치한 가장 오래된 얼음은 강하게 압축되어 있고, 매년 켜켜이 쌓인 층은 너무 얇아 공기 방울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공기 방울들은 포접체(clathrate)라고 불리는 ‘격자 형태의’ 얼음 결정으로 압축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상태일 수 있다
스위스 베른 대학에서 과거 기후 및 빙하코어 과학 그룹을 맡고 있는 후베르투스 피셔(Hubertus Fischer)는 “우리는 불과 1미터로 압축된 얼음 바닥에 지난 2만 년을 거쳐온 기후 역사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는 현존하는 빙하코어의 1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두께다.
크라우스와 피셔가 개발 중인 새로운 장치 이름은 딥슬라이스(deepSLice)다(이 장치의 측면에 붙은 레이저 경고 라벨 바로 아래에는 같은 이름의 호주 피자 가게에서 선물한 피자 메뉴가 붙어 있다). 딥슬라이스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실험실 공간의 절반을 차지하는 레이저 유도 승화 추출 장치(LISE)다. LISE는 10cm 두께의 얼음 조각에 근적외선 레이저를 계속 쏴서 조각이 극도로 낮은 압력과 온도에서 고체에서 기체로 바로 승화되도록 만든다. 승화된 기체는 15K(-258°C)로 냉각된 6개의 빨대형 금속 튜브에 담겨 응결되며, 각 튜브에는 얼음에서 얻은 공기 1cm가 보관된다. 마지막으로 공기 시료는 맞춤형 흡수 분광계에 놓이는데, 이 기계에 적용된 양자 연쇄반응 레이저(Quantum Cascade Laser, QCL) 기술은 기체 시료를 통과하도록 광자(光子)를 발사해 이산화탄소와 메탄 및 아산화질소의 농도를 동시에 측정한다. 이 시스템의 또 다른 큰 장점은 과학자들이 얼음을 녹여서 물에 녹지 않는 메탄을 측정하고 얼음을 갈아서 이산화탄소를 측정했던 기존 분석 방법에 비해 필요한 얼음의 양과 작업량이 훨씬 더 적다는 것이다.
고대 빙하를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미국 오리건 주립 대학교의 빙하코어 과학자이자 콜덱스(Center for Oldest Ice Exploration, COLDEX)의 빙하 분석 책임자 크리스토 뷔제르트(Christo Buizert)는 “딥슬라이스가 완벽히 차별화된 특별한 기능을 제공한다”고 평가했다. 그가 속한 콜덱스는 유럽의 비욘드 EPICA와 유사한 미국 연구기관으로, 150만년 전 빙하코어까지 시추하기 위해 유럽 연구원들과 ‘선의의 경쟁’을 펼치고 있다.
뷔제르트는 “딥슬라이스의 목표는 얼음을 승화시키는 것”이라며 “사람들은 이 방법을 오랫동안 시도해 왔지만 얼음 조각에서 기체를 추출하는 방법 중 가장 어려운 편에 속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 방법은 기체를 100% 추출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받고 있지만, 실행하기가 매우 까다롭다는 점에서 딥슬라이스 팀이 이러한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고 덧붙였다.
크라우스와 피셔가 빙하코어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까지는 앞으로 약 3년이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추가 분석을 위해 분광계에서 시료를 다시 채취하는 방법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이들은 남극에서 출발한 선박의 냉동 컨테이너에 실린 얼음이 이탈리아를 거쳐 연구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모든 준비가 마무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크라우스는 “최근 결과를 통해 연구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고 실제로 우리는 목표로 했던 정밀도를 달성한 이상 이 기술을 곧 실용화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이 글을 쓴 크리스티안 엘리엇(Christian Elliott)은 시카고에 거주 중인 과학 및 환경 부문 기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