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미.중 갈등 속의 반도체 산업 전망
전문가들은 올해 반도체 업황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이전부터 예측해왔다. 최근 전자기기 소비심리가 위축됨에 따라 반도체 산업 또한 하락세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반도체 시장은 수요 등락 주기에 상당한 영향을 받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경기 순환이나 차세대 반도체 개발과 관련된 우려보다도 반도체를 둘러싼 지정학적 문제가 더욱 심각해 보인다.
최근 몇 달 동안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반도체 수출을 통제하고, 미국인의 중국 반도체 기업 취업을 제한하는 등 유례없이 광범위한 조치를 시행해왔다. 이와 동시에 미국 정부는 대규모 연방 정부 보조금을 투입하여 반도체 제조기업들에 다시 미국 내에 공장을 건설하도록 유도했다. 미국뿐만 아니라 주요 반도체 회사들의 본사가 위치한 유럽과 아시아 국가들도 시장 지위를 사수하기 위해 이와 비슷한 정책들을 도입하였다.
원래 반도체는 세계 곳곳에 분산된 공급망에 오랫동안 의존해왔으며, 기업들은 어디에서 누구와 협력하여 사업을 진행할지에 대해 광범위한 자유를 보장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2023년에도 지속됨에 따라 반도체 산업에 지정학적 문제라는 불확실성이 새롭게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 5,000억 달러(약 630조 원) 규모의 반도체 산업에 이러한 지정학적 불확실성의 출현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될지 MIT 테크놀로지 리뷰가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강력한 ‘리쇼어링’ 지원 정책
2022년 미국은 자국 반도체 생산을 장려하기 위한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을 통과시켜 반도체 제조업과 연구에 520억 달러(약 65조 원)를 투입하기로 했다. 이 중 390억 달러(약 49조 원)가 미국 내 공장 설립에 사용될 예정이다. 기업들은 2023년 2월부터 해당 보조금을 공식적으로 신청할 수 있으며, 이후 신청 순서에 따라 보조금이 지급된다.
일부 보조금은 미국에 기반을 둔 기업들의 군사용 반도체 생산에 투입될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 정부는 오래전부터 해외에 의존하는 반도체 공급망과 관련하여 국가 안보에 위협적이라고 우려해 왔다. 전 대만 국회의원이자 현재 미국 하버드 케네디스쿨(Harvard’s Kennedy School)에서 반도체와 지정학 사이의 교차점을 연구하고 있는 제이슨 수(Jason Hsu) 선임 연구원은 “미국 국방 공급망을 재건하기 위해 앞으로 더 많은 반도체 공장이 미국 내에 다시 건설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대만 반도체 대기업 TSMC가 미국에서 현재 가장 최신 세대인 3나노 및 5나노 칩을 생산하기 위해 400억 달러(약 50조 원)를 투자하기로 결정한 주요 이유 중 하나가 국방 목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하지만 상업용 반도체 생산의 ‘리쇼어링(reshoring, 해외로 진출한 기업이 국내로 복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상업용 반도체 가운데 일반 소비재나 데이터 센터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칩은 아시아에서 생산된다. 이러한 제조업 기반을 미국으로 이전한다면 연방 보조금이 있다 하더라도 제품의 생산 비용을 높이고 상업적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다. 지난 2022년 4월 TSMC 창업자 모리스 창(Morris Chang)은 미국에서의 반도체 제조 비용이 대만에서보다 50% 더 높다고 말했다.
중국을 포함한 국제문제 전략자문 회사인 올브라이트 스톤브리지(Albright Stonebridge)의 폴 트리올로(Paul Triolo) 수석 부사장은 “문제는 미국에서 생산된 반도체를 구입해야 할 애플, 퀄컴, 엔비디아가 이 반도체를 적정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을지 여부이다. 왜냐하면 대만에서 칩을 구입하는 것이 여전히 더 저렴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만약 반도체 회사들이 미국의 높은 인건비를 감당할 방법을 찾지 못하거나 정부 보조금을 지속적으로 수급하지 못한다면, 이들 기업은 장기적으로 미국에서 반도체 생산을 이어가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정부 보조금이 계속 지급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자국 내 반도체 공장 수를 늘리려는 나라는 미국뿐만이 아니다. 대만은 2022년 11월 반도체 회사들에 큰 세금 감면 혜택을 주기 위한 지원법을 통과시켰다. 일본과 한국도 마찬가지의 일을 하고 있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컨설턴트이자 전 반도체 업계 임원인 워즈 아메드(Woz Ahmed)는 유럽연합도 2023년 보조금을 책정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는 내년이 되어서야 최종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EU 회원국 사이의 합의를 거쳐야 하므로 미국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릴 것”이라고 했다.
새로운 제약 내에서의 시장 탐색
2022년 10월 미국에서 첨단 반도체 및 기술 수출을 대상으로 도입한 규제는 미국이 본격적으로 중국 반도체 산업을 궁지로 몰아넣기로 결심했음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이전까지 특정 중국 기업에만 판매를 금지하던 규제가 사실상 중국의 모든 기업으로 확대되었다. 여기에는 핵심 반도체 제조 장비의 판매 제한과 같은 새로운 조치도 있다.
이 정책들은 반도체 산업의 규제를 미지의 영역으로 이끌었다. 어떤 반도체와 제조 기술을 ‘첨단(advanced)’으로 간주할 것인가? 만일 중국 기업이 첨단 반도체와 구형 반도체를 모두 만든다면, 구형 반도체 제조에는 여전히 미국 기술을 사용할 수 있을까?
미국 상무부는 2022년 10월 말 질의응답을 통해 몇 가지 질문에 답변했다. 이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반도체 제조 라인이 별도의 공장 건물에 있을 경우 이전 세대 설비가 제한 조치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그러나 규제 방식이나 적용 범위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이 규제는 2023년부터 발효될 예정이다. 중국 기업들은 규제를 피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이미 한 기업은 생산하고 있는 반도체가 구형인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을 시도한 바 있다. 중국 시장은 거대하고 수익성이 높기 때문에, 중국이 아닌 나라의 기업들도 우회로를 찾아 나설 것이다.
아흐메드는 “규제 집행 인력이 현장에 충분하지 않거나 관리가 부실할 경우, 문제가 알려지는 즉시 많은 사람이 규제를 위반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이 올해 더 많은 규제를 신설해 중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수출 통제, 해외투자 검토 강화, 양자 컴퓨팅을 비롯한 반도체 관련 산업을 대상으로 한 추가적인 조치와 같은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모두가 여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크리스 밀러(Chris Miller) 터프츠 대학교(Tufts University) 국제 사학과 교수는 미 정부가 잠시 시간을 두고 현재의 규제에 집중할 것으로 생각한다. 신간 《반도체 전쟁: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을 위한 싸움(Chip War: The Fight for the World’s Most Critical Technology)》의 저자인 밀러는 “2023년에 반도체 수출 규제가 크게 확대될 것으로 예상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는 “바이든 행정부는 집권 초기 2년의 대부분을 규제를 세우는 데 보냈다. 그들은 이 정책을 지속하며 당분간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것이다”라고 말한다.
중국의 대응
그동안 중국 정부는 외교 성명을 몇 차례 발표하고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에 제소한 것 외에는 미국의 새로운 수출 규제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이보다 더 적극적인 반응이 나올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중국은 무역 제한 조치 때문에 미국에 크게 반격할 만큼 반도체 분야에서 특장점을 지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존 리(John Lee) 이스트웨스트 퓨처스 컨설팅(East West Futures Consulting) 이사는 “미국은 중국과 같이 반도체 공급망 하류에 위치한 기업들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는 핵심 기술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 즉 이는 중국에 적당한 보복 카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국은 전투기 부품과 같은 군수품과 배터리, 스크린과 같은 일반 소비재 부품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희토류 정제 부분에 있어 전 세계 생산량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을 제한한다면 미국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은 미국에 자신들의 불만을 드러내기 위하여 반도체 기업이나 혹은 다른 미국 기업들을 제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 반도체 분야에서 이러한 극단적인 대결로 향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밀러는 “중국 지도자들은 이 방식이 미국뿐 아니라 중국에도 엄청난 희생이라는 대가가 따를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고 본다”라고 말한다. 현재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전 세계 공급망과 협력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반도체 노광(lithography) 기계, 코어 반도체 설계자산(IP) 및 실리콘 웨이퍼 등을 다루는 해외 기업에 대한 중국의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비즈니스 환경을 더욱 악화시키는 공격적인 보복을 피하는 것이 “아마 중국에 가장 현명한 전략”일 것이라고 그는 분석한다.
중국은 미국에 반격하는 대신 자국 내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는 데 더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이르면 2023년 1분기에 자국 기업에 대한 1조 위안(약 185조 원) 규모의 지원책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막대한 보조금 지원은 지난 10년 동안 중국 반도체 산업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검증된 방식이다. 그러나 2022년 대표적인 중국 정부 반도체 투자 펀드의 효율성 문제가 공론화되고, 고위급 인사 부패 사건이 불거진 이후 이 자금을 기업들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적절히 배분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대만 문제
미국이 홀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미국이 반도체 기술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대체할 수 없는 반도체 제조의 핵심 공정을 보유한 다른 나라들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여기에는 네덜란드, 일본, 한국과 대만이 포함된다.
이 나라들은 비록 중국과 이념적인 측면에서 차이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반도체 교역에서 많은 이득을 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네덜란드와 일본은 미국의 수출 규제 일부를 자국 규정에 성문화하기를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들이 진심으로 철저하게 중국 규제에 동참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독일에 기반을 두고 있는 리는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인들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분명히 있다”면서도 “단순히 미국인들을 따라 발을 들여놓는 것이 유럽에 이롭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 또한 꽤 강력하다”라고 말한다. 네덜란드 반도체 노광장비 회사 ASML의 피터 베닝크(Peter Wennink) CEO는 ASML이 수출 통제를 위해 ‘희생했으며’ 반대로 미국 회사들이 이익을 봤다고 말했다.
국가 사이의 균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커질 수 있다. 밀러는 “역사적으로 이러한 국가 간 기술 규제 동맹은 잘 유지되지 않았으며,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노력과 관리가 필요했다”라고 말한다.
대만은 특히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역사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대만의 경제는 중국 경제와 깊이 얽혀 있다. TSMC를 비롯한 많은 대만 반도체 회사들은 중국 회사와 거래하고 중국에 공장을 짓는다. 미국은 2022년 10월 TSMC에 1년간 수출제한 면제권을 부여했지만 2023년 만기가 되면 이를 갱신하지 않을 수 있다. 중국 정부와 대만 사이의 군사적 충돌로 인해 모든 반도체 제조 활동이 중단될 가능성도 있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가까운 시일 내에 이러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는 “따라서 대만 기업들은 불확실성에 대비해 위험회피를 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기업들이 중국에서의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TSMC가 미국 애리조나에 두 개의 반도체 공장을 설립할 것으로 계획한 것처럼 해외 시설에 더 많은 투자를 고려할 수 있다.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미국 쪽으로 기울고 미국의 수출 제한 체제를 중심으로 동맹이 공고해지면서, 한때 세계화됐던 반도체 산업은 이념적 진영에 따라 갈라지게 되었다. 수는 “전 세계의 반도체 표준이 사실상 둘로 나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 중 하나는 미국과 그의 동맹국들이며, 다른 하나는 중국을 비롯해 중국이 자국의 기술 표준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중동, 유라시아, 아프리카의 다양한 국가들로 구성된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재정 원조와 무역 거래에 의존해 온 나라들은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할 때 중국 기술을 도입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수는 말한다.
비록 이 변화는 매우 천천히 전개되겠지만, 수는 이러한 분리가 불가피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각 나라들은 이를 대비한 비상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는 “대안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중국 전략’은 무엇인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