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분자 배치만 바꿔 치매 원인 동시 조절하는 전략 규명
KAIST(총장 이광형) 화학과 임미희 교수 연구팀이 같은 분자라도 구조 배치에 따라 알츠하이머병에 작용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음을 규명했다고 22일 밝혔다. 전남대학교(총장 이근배) 화학과 김민근 교수, 한국생명공학연구원(KRIBB, 원장 권석윤) 이철호 박사, 김경심 박사와의 공동연구를 통해 위치 이성질체(같은 구성 성분을 가지지만 원자들이 붙는 위치가 다른 분자)의 차이를 분자 수준에서 확인했다.
알츠하이머병은 아밀로이드 베타(뇌에 쌓여 신경세포를 손상시키는 단백질), 금속 이온, 활성 산소종(산화 스트레스를 일으켜 세포를 손상시키는 불안정한 산소 분자) 등 여러 원인이 함께 작용하는 복합 질환이다. 연구팀은 분자의 위치가 달라지자 활성 산소 반응 정도, 아밀로이드 베타 및 금속 결합 성질이 눈에 띄게 달라졌으며, 알츠하이머 마우스 모델 실험에서 기억력과 인지 기능이 유의미하게 개선됨을 확인했다. 이번 연구는 국제 학술지 <Journal of the American Chemical Society(IF 15.7, 화학 분야 상위 5.0%)> 14일 게재됐다.

미세한 구조 차이로 병리적 반응 크게 달라져
기존 알츠하이머병 치료법은 아밀로이드 베타나 활성 산소종 등 한 가지 원인만 겨냥해 왔다. 그러나 알츠하이머병은 여러 원인이 동시에 작용하는 질환으로, 이러한 접근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뇌에 쌓이는 아밀로이드 베타, 금속 이온, 활성 산소종 등 여러 물질이 서로 영향을 주며 병을 악화시킨다. 특히 금속 이온은 아밀로이드 베타와 결합해 독성을 키우고, 이 과정에서 활성 산소종 생성이 증가해 뇌 신경세포 손상이 더욱 심해진다. 따라서 알츠하이머병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해서는 여러 발병 원인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연구팀이 주목한 ‘위치 이성질체’는 같은 재료로 만든 분자라도 붙는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연구진은 구조가 조금씩 다른 세 가지 분자(파라, 오르토, 메타 이성질체)를 비교 분석했고, 그 결과 아주 미세한 구조 차이만으로도 활성 산소를 줄이는 능력, 아밀로이드 베타와의 결합 방식, 금속과의 상호작용 특성이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전자 공여기(전자를 제공하는 화학 그룹)가 도입된 방향족 소분자 화합물의 위치 이성질체를 활용해 알츠하이머병의 다중 병인들에 대한 차별적 반응성 및 메커니즘을 규명했다. 화합물의 치환기 위치(파라, 오르토, 메타)에 따른 구조적 차이가 산화 환원 반응성 및 금속 이온과의 결합 능력을 변화시켰다.
산화 반응성이 높고 금속 이온과 한자리 배위 결합이 가능한 파라 이성질체는 아밀로이드 베타와의 공유 결합 복합체 형성뿐만 아니라 펩타이드 산화 및 산화적 절단을 유도했다. 또한 금속 이온과의 킬레이트 결합(금속 이온을 집게처럼 잡아 안정화시키는 결합)이 가능한 오르토 이성질체는 구리 이온과의 직접적인 전자 이동을 통해 펩타이드 산화와 산화적 절단을 유발했다.
즉, 분자의 ‘배치’를 바꾸는 것만으로 알츠하이머병의 주요 원인들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동시에 조절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마우스 실험에서 인지 기능 개선 확인
연구팀은 사람의 치매 유전자를 지닌 알츠하이머 마우스 모델(APP/PS1)을 이용한 실험을 통해, 해당 화합물이 실제 생체 내에서도 효과를 보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알츠하이머 마우스 모델 실험에서는 특정 구조를 가진 화합물(파라 이성질체)이 활성 산소종, 아밀로이드 베타, 금속-아밀로이드 베타 복합체를 한 번에 조절하는 효과를 보였다. 이 화합물은 기억을 담당하는 뇌 해마 부위의 신경세포 손상을 줄이고, 아밀로이드 플라크(뇌에 쌓이는 아밀로이드 베타 덩어리) 축적을 감소시켜, 저하됐던 기억력과 인지 기능을 유의미하게 개선했다.
위치 이성질체 간 반응성 차이는 APP/PS1 알츠하이머병 모델 마우스에서의 효능 차이로도 명확히 확인됐다. 아밀로이드 베타, 금속-아밀로이드 베타 복합체, 활성 산소종을 모두 표적할 수 있는 파라 이성질체는 뇌 내 산화적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아밀로이드 플라크 축적을 감소시키는 동시에, 손상된 인지 및 기억 능력을 개선하는 효과를 보였다.
임미희 KAIST 화학과 교수는 “이번 연구는 분자의 구성 성분을 바꾸지 않고도 구조의 배치만 조절해 여러 알츠하이머 발병 원인에 동시에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 연구”라며 “알츠하이머병처럼 원인이 복잡하게 얽힌 질환을 보다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는 새로운 치료 전략의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본 연구는 소분자 화합물의 위치 이성질에 의해 유도되는 미세한 구조 변화가 분자의 화학적 특성과 병리적 표적에 대한 반응성에 미치는 영향을 분자 수준에서 규명한 데 의의가 있다. 동일한 분자 골격과 치환기를 공유하더라도 치환기 위치의 차이에 따라 병리적 인자들과의 상호작용 및 화학적 반응 양상이 달라질 수 있음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이를 통해 다중 표적이 가능한 ‘다기능 소분자 화합물’ 설계를 위한 새로운 개념적 틀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