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IST, 비닐처럼 유연한데 열에 강한 통신 반도체 개발
비닐처럼 얇고 유연하면서도 뜨거운 열을 견딜 수 있는 차세대 고성능 통신 반도체 스위치가 개발됐다.
UNIST(총장 이용훈) 전기전자공학과 김명수 교수팀은 8일, 단국대학교 김민주 교수팀과 공동으로 고성능 유연 RF 스위치(무선 통신 시스템에서 고주파 신호의 경로를 연결하거나 차단하는 반도체 소자)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이 스위치는 비닐처럼 얇고 유연한 고분자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내열성이 뛰어나고, 무기물 RF 스위치와 맞먹는 통신 성능을 지녔다. 실험 결과 128.7℃의 고온 환경에서도 10년 이상 데이터가 유지될 수 있는 수준의 안정성을 보였다. 통신 성능 검증 실험에서는 5G와 6G 통신의 주요 주파수 대역인 밀리미터파(mmWave) 대역을 포함해 최대 5.38테라헤르츠(THz)까지 신호를 안정적으로 전달하고 차단할 수 있었다. 또 3,600회 이상 반복해서 굽혀도 성능 저하 없이 정상 작동해 탁월한 유연성을 증명했다. 연구 결과는 재료 과학 분야 국제 학술지 ‘Advanced Functional Materials(IF 19.0)’ 12월 12일자에 게재됐다.
유연하지만 열에 약했던 한계를 극복하다
RF 스위치는 신호 간섭을 막고 전력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통신 부품이다. 휴대폰에서 안테나로 들어온 신호를 송신 회로로 보낼지 수신 회로로 보낼지 결정하는 등 교통정리 역할을 한다. 상용화된 RF 스위치는 딱딱하고 접히면 금이 가기 쉬운 무기물(규소, 갈륨 같은 무기 원소로 만든 반도체)을 기반으로 한다. RF 스위치를 기기의 접히지 않는 곳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폴더블 휴대폰’은 만들 수 있어도, 완전히 돌돌 말리거나 입을 수 있는 수준의 통신 기기를 만들 수 없었던 이유다.
차세대 통신 기술인 6G와 사물인터넷(IoT) 환경에서는 신체에 착용하거나 사물의 굴곡진 면에 부착할 수 있는 유연한 전자 소자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고분자(플라스틱처럼 긴 사슬 모양의 분자가 연결된 물질) 소재를 활용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고분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첫째, 열에 취약하다. 고분자는 고온의 반도체 후공정을 견디기 어렵고 작동 중 발생하는 열에 의해 성능이 급격히 저하된다. 둘째, 고주파 신호를 처리할 때 에너지 손실이 크다. 일반적인 유기고분자 RF 소자는 유연한 장점이 있지만, 열에 잘 녹고 무기물 RF 소자보다 통신 성능이 떨어진다. 특히 5G·6G 대역에서 통신 성능 저하가 심하다.
연구팀은 이러한 ‘열적 불안정성’과 ‘고주파 성능 저하’라는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고분자 소재와 소자 구조를 탐색했다.

고분자 박막을 금박 사이에 끼운 구조로, 128℃ 이상 고온에서도 안정적이고 5.38테라헤르츠 고주파 신호까지 처리할 수 있다.
상단(좌): pV3D3 폴리머 기반 RF 스위치 모식도. 상단(중): 고분자 내부에 금이 뭉쳐 형성된 미세한 전도 경로가 확인된다. 이 전도 경로가 만들어지거나 끊어지 면서 전류의 흐름을 on-off 할 수 있다. 상단(우): 가속노화실험을 통해서 분석된 pV3D3 RF 스위치의 내열특성 분석. 128.7 도씨에서 10년간 데이터를 유지 가능 함을 보여준다. 하단(좌): RF 스위치의 S-파라미터 분석 결과. S-파라미터는 고주 파 신호가 소자를 지나가면서 얼마나 잘 ‘통과되고’, 얼마나 ‘막히는지’를 숫자로 나타낸 지표다. 5.38 THz의 높은 차단 주파수를 달성하였다. 하단(우): 본 연구(빨 간색 선)와 기존의 RF 스위치와의 비교도. 낮은 정적 전력소모,
높은 내열성을 달 성하였다.
3차원 그물망 구조가 열을 버틴다
연구팀은 특수 고분자 소재인 ‘pV3D3’를 이용해 이 같은 RF 스위치를 개발할 수 있었다. pV3D3는 3차원적으로 서로 얽힌 그물망 구조(가교 구조)를 가지고 있어 일반적인 플라스틱보다 열과 화학 물질에 훨씬 강하게 견디며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 특성이 우수하다.
연구팀은 ‘iCVD(initiated Chemical Vapor Deposition, 개시제를 이용한 화학 기상 증착법)’을 통해 균일하고 결함이 적은 pV3D3 고분자 박막을 합성했다. iCVD는 기체 상태의 원료(단량체)와 개시제를 반응시켜 기판 표면에 얇은 고분자 막을 입히는 공정 기술이다. 액체 공정과 달리 용매를 사용하지 않아 불순물이 적고, 울퉁불퉁하거나 휘어지는 표면에도 매우 균일하게 박막을 형성할 수 있다.
이 pV3D3 박막을 머리카락보다 가는 금박 사이에 적층시켜 RF 스위치를 만들었다. 전압이 가해지면 금박에서 빠져나온 이온이 이동하면서 전기가 흐르는 길이 만들어지고, 전압 방향이 바뀌면 이 통로가 끊어지면서 전류가 차단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는 메모리(Memory)와 레지스터(Resistor)의 합성어인 멤리스터(Memristor, 전압에 따라 저항값이 변하고 전원이 꺼져도 그 상태를 기억하는 비휘발성 소자) 방식이다. 기계적 스위칭 없이 전류 흐름을 껐다가 켜기 때문에 수천 번 굽혀도 고장나지 않는다.
핵심은 금의 산화 저항성이다. 금은 산화되지 않기 때문에 고온에서도 필라멘트가 끊어지지 않고 유지된다. 실제 측정 결과, 128.7℃ 이상의 고온에서도 안정적인 스위칭이 가능했으며, 밀리미터파(mmWave, 파장이 1~10mm인 초고주파) 대역인 67GHz까지 낮은 신호 손실로 작동함을 확인했다.
통신 성능 면에서도 획기적이다. 최대 5.38테라헤르츠까지 신호를 안정적으로 전달하고 차단할 수 있었다. ‘5.38테라헤르츠’는 고분자 기반 스위치가 처리할 수 있는 주파수 대역 중 가장 넓은 범위로, 현존하는 유기 고분자 스위치 중 최고 수준의 성능이다. 테라헤르츠(THz)는 1초에 1조 번 진동하는 주파수를 의미하는데, 5G는 수십~수백 기가헤르츠(GHz), 6G는 테라헤르츠 대역을 사용한다.
또한 유연 기판 위에서 3,600회의 굽힘 테스트 후에도 성능을 유지해 기계적 유연성까지 확보했다.
김명수 교수는 “이번 연구는 유연 소자는 열에 약하고 성능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깬 사례”라며 “향후 고온이나 굴곡진 환경에서도 작동해야 하는 차세대 웨어러블 통신 기기나 IoT 센서, 자율주행차량의 통신 시스템에 폭넓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실용화 가능성은 높다. 웨어러블 기기는 체온이나 여름철 직사광선으로 고온에 노출되고, 자율주행차의 통신 모듈은 엔진 열과 한여름 차 안의 고온을 견뎌야 한다. 이 RF 스위치는 이런 가혹한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또한 피부 부착형 통신 센서, 휘어지는 스마트폰, 극한 환경용 IoT 기기 등 다양한 차세대 유연 전자 시스템의 핵심 부품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번 연구는 고분자 소재가 고성능 RF 소자에 부적합하다는 통념을 깨고, 무기물 소재에 버금가는 고주파 성능과 내열성을 확보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 기술은 6G 통신 시대를 앞당기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