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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ST, DNA처럼 꼬인 물질이 전자 스핀 뒤집는다

손대칭성 물질이 특정 스핀만 걸러낸다는 기존 가설을 뒤집었다. 물질이 전자 스핀을 직접 바꾼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입증해 스핀트로닉스 소자 설계에 새 길을 열었다.

나선형으로 꼬인 물질이 특정 방향의 전자만 걸러낸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튕겨나가는 전자의 회전 방향까지 뒤집는다는 사실이 실험으로 입증됐다. UNIST(총장 이용훈) 물리학과 남궁선·박노정 교수팀은 7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빙하이옌 교수팀과 함께 손대칭성 물질(DNA나 용수철처럼 나선형으로 꼬인 구조)이 전자의 스핀(회전 방향)을 수동적으로 걸러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뒤집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손대칭성 물질이 원하는 스핀만 통과시키고 나머지는 그대로 튕겨내는 ‘스핀 필터’ 역할을 한다는 가설이 유력했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물질이 튕겨 나가는 전자의 스핀까지 적극적으로 바꾼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줬다. 연구팀은 텔루륨 나노선에 그래핀 전극을 연결해 전류를 흘리고, 특수 현미경으로 스핀 분포를 실공간에서 관찰했다. 연구 성과는 국제 학술지 <에이씨에스 나노(ACS Nano)> 2025년 12월 23일자에 게재됐다.

용수철이나 DNA처럼 생긴 거울상이 다른 손대칭성 물질에 전류를 흘리면
꼬여진 방향에 따라 자성을 띄는 스핀 전류가 흐르게 되는 원리를 나타내는 모식도.
기존 가설과 달리 양쪽 방향에서 같은 자성을 띄는 스핀 전류가 흐른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관측하여 보고함.

전자의 ‘회전 방향’을 바꾸는 나선

스핀은 전자가 가진 고유한 회전 방향이다. 마치 팽이가 시계방향 또는 반시계방향으로 돌 수 있듯, 전자도 위쪽(↑) 또는 아래쪽(↓) 스핀을 갖는다. 이 스핀이 한쪽으로 정렬되면 자석의 N극이나 S극처럼 자성이 생긴다.

현재 대부분의 전자기기는 전자의 전하(음전하)를 이용한다. 전하의 이동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이 방식을 ‘일렉트로닉스(electronics)’라고 한다. 반면 전자의 스핀을 이용하는 방식을 ‘스핀트로닉스(spintronics)’라고 하는데, 에너지 손실이 적고 정보 처리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손대칭성(키랄성)은 왼손과 오른손처럼 겉보기에는 같지만 거울에 비추면 다르게 보이고 절대 포개지지 않는 구조를 말한다. DNA는 오른쪽으로 꼬인 이중나선 구조를 가지며, 용수철도 시계방향 또는 반시계방향으로 꼬여있다. 이런 나선형 손대칭성 물질에 전류를 흘리면, 특정 방향의 스핀을 가진 전자만 통과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문제는 이 현상의 원리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학계에서는 두 가설이 맞섰다. 첫째는 ‘스핀 필터’ 가설로, 손대칭성 물질이 원하지 않는 스핀은 튕겨내고 맞는 스핀만 통과시킨다는 것이다. 마치 체로 거르듯 걸러낸다는 해석이다. 둘째는 ‘스핀 편극자’ 가설로, 전자의 스핀 방향을 물질의 구조에 맞춰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텔루륨(Te) 원소로 만든 나노선을 이용해 이를 실험적으로 규명했다. 텔루륨 나노선은 원자들이 나선형으로 꼬여 있어 손대칭성을 띤다. 여기에 스핀-궤도 결합 효과가 매우 작은 그래핀을 전극으로 연결해 전류를 흘렸다.

핵심은 스핀 분포를 직접 관찰한 것이다. 연구팀은 원편광(빛의 편광 방향이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빛) 빛을 이용한 자기광(magneto-optics) 효과로 스핀을 측정했다. 원편광 빛은 특정 스핀을 가진 전자에 더 많이 흡수되는 성질이 있어, 흡수 정도 차이를 측정하면 전자의 스핀 방향을 알 수 있다.

관측 결과는 놀라웠다. 나노선 입구(전자가 들어가는 쪽)와 출구(전자가 나오는 쪽)에서 나타난 스핀의 방향이 서로 같았다. 만약 ‘스핀 필터’ 가설이 맞다면, 걸러진 스핀과 통과한 스핀의 부호가 서로 달라야 한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반대였다. 이는 손대칭성 물질이 필터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튕겨 나가는 전자의 스핀까지 적극적으로 뒤집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노정 교수팀은 이론 계산으로도 이를 확인했다. 손대칭성 물질을 통과하는 전자가 나선을 따라 돌아가며 궤도 각운동량(전자가 원운동하며 갖는 회전 운동량)을 얻고, 이 궤도 각운동량이 스핀-궤도 결합(전자의 궤도 운동과 스핀이 서로 영향을 주는 현상)을 통해 스핀 방향을 결정한다는 과정을 밀도범함수이론 계산으로 밝혀냈다.

손대칭성에 따른 스핀 분포의 실공간 관측 결과(왼쪽) 서로 다른 회전 방향을 지닌 손대칭성 텔레늄(중앙)
텔레륨 나노선 물질 양쪽에 그래핀 전극을 붙인 소자의 실제 광학 이미지(우측) 자기 원형 이색성(RMCD)으로 측정한 스핀 분포 지도.

양자컴퓨터와 초저전력 소자로 가는 길

이번 연구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던 손대칭성 물질의 스핀 메커니즘을 명확히 규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전류가 나노선 자체를 자석으로 만든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자기장 대신 전기장만으로도 자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자성을 전기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면, 기존 자성 메모리보다 훨씬 효율적인 스핀트로닉스 소자를 만들 수 있다.

남궁선 교수는 “오랫동안 논쟁 대상이 되었던 손대칭성 물질 내 스핀의 거동을 명확히 시각화하여 증명해낸 연구”라며 “향후 손대칭성 물질을 기반으로 한 스핀트로닉스 소자와 양자 소자 설계에 단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응용 가능성도 크다. 손대칭성 물질의 선택적 스핀 필터링 기능은 스핀 기반 양자 정보를 원하는 방향으로 전송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양자컴퓨터는 정보의 기본 단위인 큐비트(qubit)를 전자 스핀으로 구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스핀 방향을 정확히 제어하고 전송하는 기술이 필수적이다. 이번 연구 결과는 스핀을 능동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양자컴퓨터 개발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스핀 전류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스핀트로닉스 소자는 전하 기반 소자보다 에너지 효율이 높다. 전하가 이동할 때는 저항으로 인한 열 손실이 크지만, 스핀은 전하를 직접 이동시키지 않아도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 에너지 낭비가 적다.

물론 실용화까지는 과제가 남아있다. 나노선 수준의 실험실 성과를 대량 생산 가능한 반도체 공정으로 옮기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상온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손대칭성 물질을 찾고, 기존 반도체 소자와 호환되는 구조로 설계하는 것도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럼에도 이번 연구는 스핀을 제어하는 새로운 원리를 제시했다. 기존에는 자기장이나 강한 스핀-궤도 결합 물질을 써야 스핀을 조작할 수 있었지만, 이제 손대칭성 구조만으로도 스핀을 능동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렸다. 차세대 양자컴퓨터와 초저전력 스핀트로닉스 소자 개발에 새로운 설계 원리를 제공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