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 개발에 혁신을 가하는 머신러닝
82세의 혈액암 환자인 ‘폴’은 항암 치료를 여섯 차례나 받았지만, 병의 진행이 빨라 암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듯했다. 길고 고된 항암치료를 받을 때마다 주치의들이 여러 항암제 가운데서 효과가 있을 만한 약물을 찾아 시도했음에도 폴에게는 흔히 사용되는 항암제가 통하지 않았다.
폴은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었다. 주치의들은 그를 빈 의과대학교(Medical University of Vienna)에서 진행하는 임상시험에 등록했다. 어차피 손해 볼 것 없는 결정이었다. 빈 의과대학에서는 엑사이언티아(Exscientia)라는 영국 회사에서 새롭게 개발한 약물 선정 기술(matchmaking technology)을 시험하고 있었다. 약물 선정이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생물학적 차이를 고려하여 각각의 환자에게 필요한 정확한 약물을 연결해주는 기술이다.
연구진은 폴(임상시험 상 신원이 가려져 연구자들은 그의 실명을 알 수 없었다)에게서 소량의 조직 표본을 채취하였다. 그들은 정상세포와 암세포가 모두 들어있는 표본을 100개 이상 나누어 여러 가지 약물 혼합물에 노출시켰다. 그런 다음 로봇 자동화와 컴퓨터 비전(세포 내 작은 변화를 식별하도록 훈련된 머신러닝 모델)을 사용해 경과를 관찰했다.
사실상 연구진은 의사들이 해왔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떤 약물이 효과가 있을지 종류별로 시도해 보는 일이었다. 그들은 환자들에게 항암제를 투여하고 반응을 평가하기 위해 수개월을 기다리는 대신 시험관 안에서 수십 가지 치료법을 동시에 평가하였다.
이 방식으로 연구진은 어떤 약물이 적절할지 꼼꼼하게 탐색할 수 있었다. 일부 약은 폴의 암세포를 죽이지 못했다. 또 어떤 약은 그의 정상세포를 공격했다. 약물 선정 결과 가장 적합할 것으로 예측된 약이 있었지만, 폴은 이 약을 쓰기에 몸이 너무 허약했다. 대신에 그는 2순위로 나온 다른 약을 쓰기로 했다. 거대 제약회사 존슨앤존슨(Johnson & Johnson)에서 판매하는 암 치료제였다. 이 약은 과거 임상시험에서 폴과 같은 종류의 암에 효과가 없다는 결과가 나와 주치의들이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이었다. 이 치료제는 폴에게 효과적이었다. 2년 후 폴은 암이 깨끗이 사라져 완전관해 판정을 받았다. 앤드루 홉킨스(Andrew Hopkins) 엑사이언티아 CEO는 이 접근법이 암 치료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며, “약물 선정 기술의 표본 시험에서 효과적이었던 약물은 실제 환자에게 효과가 있었다”라고 말한다.
적확한 약물을 선별하는 것은 엑사이언티아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들은 전체 신약 개발 파이프라인을 점검할 계획이다. 엑사이언티아는 환자에게 잘 맞는 기존 약물을 찾아내는 일 외에도 머신러닝을 사용하여 새로운 약물을 설계하고 있다. 엑사이언티아는 더 많은 신약을 개발하여 환자에게 적합한 약을 선정할 때도 다양한 선택권을 줄 수 있게 할 예정이다.
최초로 AI의 도움을 받아 설계된 약물들은 현재 임상시험 중에 있다. 이 약제가 시판되도록 규제 당국으로부터 승인받기에 앞서, 임상시험에 참여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약물의 안전성과 실효성을 엄격히 평가한다. 엑사이언티아가 자체 개발했거나 다른 제약사와 공동 개발한 약물 2종도 2021년부터 이 절차를 밟고 있다. 엑사이언티아는 두 가지 약물에 대해서도 추가로 임상 시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홉킨스는 “기존 접근법으로는 이렇게 빠르게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같은 일을 하는 회사는 엑사이언티아뿐만이 아니다. 생명공학∙생명과학 분야의 벤처 캐피털 회사인 에어 스트리트 캐피털(Air Street Capital)의 네이선 비네쉬(Nathan Benaich)에 의하면 현재 제약 업계에서 머신러닝의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스타트업이 수백 개에 달한다. 그는 “큰 자금을 유치할 수 있을 만큼 초기 성과가 잘 나왔다”라고 평가한다.
오늘날 신약 개발에는 평균적으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십억 달러(수조 원)에 달하는 투자가 필요하다. 이제 다음 목표는 AI를 사용하여 신약 개발을 더 빠르고 저렴하게 만드는 것이다. 머신러닝 모델을 이용하면 어떤 약물이 인체에서 어떻게 작용할지 예측하고 가능성이 낮거나 없는 약물은 미리 배제하여 실험실에서 진행되는 고된 반복 작업을 줄일 수 있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제약회사 버시언(Verseon)의 아디티오 프라카시(Adityo Prakash) CEO는 신약에 대한 수요가 끊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아직 치료할 수 없거나 치료하더라도 부작용이 많은 질병이 너무 많다”라고 설명했다.
현재 전 세계 곳곳에 새로운 연구소가 설립되고 있다. 2022년 엑사이언티아는 빈에 신규 연구센터를 마련했고, 홍콩의 신약 개발 회사인 인실리코 메디슨(Insilico Medicine)은 아부다비에 큰 규모의 연구소를 새롭게 열었다. 현재까지 AI를 활용하여 개발된 약물 총 20여 종(계속 늘어나고 있음)이 임상시험 중에 있거나 임상시험을 앞두고 있다.
신약 개발 회사 앱사이(Absci)의 설립자이자 CEO인 션 매클레인(Sean McClain)은 제약 산업에서 자동화를 진행하면서 우수한 머신러닝 모델을 활용할 만한 화학 및 생물학적 데이터가 확보되었고, 이 덕분에 이러한 활동과 투자가 가능해졌다고 설명한다. 워싱턴주 밴쿠버에 소재한 앱사이는 수십억 가지의 후보 약물 구조(약물은 일련의 구조를 가지며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구조가 맞아야 한다) 중에서 어떠한 약제가 실제로 효과를 나타낼지 AI를 이용해 탐색한다. 매클레인은 “지금이 기회다”라고 말한다. 그는 “향후 5년 동안 이 업계에서 엄청난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AI 신약 개발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으며, 많은 AI 회사가 근거가 불분명한 주장을 하고 있다. 프라카시는 “누군가 어떤 약물 분자가 장에서 흡수되거나 간에서 분해되지 않는지 등을 완벽히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AI를 이용한 기술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이 기술을 도입한다고 해도 신약 개발 과정 중 가장 더디고 비용이 많이 드는 세포 및 조직 실험과 임상시험 단계를 완전히 생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이사 솔터-시드(Luisa Salter-Cid) 파이오니어링 메디슨(Pioneering Medicines) CSO(Chief Scientific Officer)는 “이 기술로 시간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다. 수작업으로 했던 많은 단계가 이미 자동화되었다”라고 말한다. 파이오니어링 메디슨은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플래그십 파이오니어링(Flagship Pioneering)의 자회사다. 솔터-시드는 “궁극적으로는 실험실에서 검증이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AI는 이미 약품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 최초로 AI 도움을 받아 설계된 약은 시장에 출시되기까지 몇 년이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 기술은 약물 설계의 초기 단계부터 최종 승인 절차에 이르기까지 제약 산업 전반을 뒤흔들 것이다.
“누군가 어떤 약물 분자가 장에서 흡수될지 완벽히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 과정의 기본 형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먼저 단백질과 같이 약물이 상호 작용할 체내 표적을 선정한다. 그다음 표적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 분자를 설계한다. 가령 표적의 작동 방식을 바꾸거나 표적 단백질의 기능을 제거하는 등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 다음 실험실에서 분자를 합성한 뒤 설계했던 대로 약물이 작동하는지,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는지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약의 안전성과 효과성을 시험한다.
수십 년 동안 화학자들은 표적 단백질을 수많은 시험관에 나눠 담은 다음 여러 후보 물질을 추가하여 관찰하는 방식으로 후보 약물을 선별해 왔다. 이는 후보 물질의 구조를 약간 바꾸거나 원자를 교체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며, 수차례 반복한다. 많은 공정이 자동화되면서 속도가 빨라졌지만, 시행착오라는 가장 중요한 과정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시험관은 신체가 아니다. 많은 약물 분자가 실험실에서는 효과가 있어 보여도 끝내 임상시험에 실패하고 만다. 생물학자인 리처드 로(Richard Law) 엑사이언티아 CBO(Chief Business Officer)는 “신약 개발은 모든 과정에서 실패가 일상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약을 개발하는 데 큰 비용이 드는 이유는 효능이 좋은 한 가지 약을 찾기 위해서 20가지 약을 설계하고 시험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차세대 제약 산업에서 AI 회사들은 신약 개발 파이프라인의 세 가지 핵심 실패 요인에 집중하고 있다. 첫째, 체내의 올바른 표적을 선택하는 것, 둘째, 표적과 정확하게 상호 작용할 수 있는 분자를 설계하는 것, 셋째, 분자가 제일 도움이 될 만한 환자를 찾는 것이다.
신약 개발 파이프라인은 분자 모델링과 같은 컴퓨터 기술을 통해 수십 년에 걸쳐 개편되었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접근 방식조차도 실험실에서의 수작업으로 모델을 구축하는 단계를 거쳐야 했다. 이 과정은 느리고 어려운 데다가 실제 조건과 다른 시뮬레이션을 생성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머신러닝을 사용하면 약물과 분자 데이터를 포함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이용해 복잡한 모델을 자동으로 구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약물이 체내에서 어떻게 작용할지 훨씬 더 쉽고 빠르게 예측할 수 있고 시뮬레이션 상에서 많은 초기 실험도 수행할 수 있다. 머신러닝 모델을 이용하면 아직 시험해 보지 않은 방대한 약물 분자 후보군을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면밀히 조사할 수 있다. 성공 가능성이 높은 분자들만 실험이나 임상시험 단계의 까다롭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들을 수행하면 된다.
심지어 이제 많은 회사가 약물 작용 시뮬레이션 전 단계인 표적 물질 선정에서도 머신러닝을 이용하고 있다. 엑사이언티아와 몇몇 회사는 자연어 처리 기술을 사용해 수십 년 전부터 축적된 방대한 과학 문헌에서 데이터 마이닝을 한다. 여기에는 수많은 유전자 염기 서열 정보와 학술 논문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문서로부터 추출된 정보는 지식 그래프(knowledge graph)로 가공된다. 지식 그래프란 ‘A가 B를 야기한다’와 같은 인과관계를 포함한 연관성을 포착하는 데이터를 만드는 방법이다. 그 결과 머신러닝 모델은 특정 질병을 치료할 때 어떤 표적에 집중해야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큰지 예측할 수 있다.
자연어 처리를 데이터 마이닝에 적용하는 것은 새롭지 않다. 하지만 대형 제약회사를 포함한 많은 제약회사가 이전에 놓쳤을지 모를 연관성을 찾는 데 AI가 도움을 줄 거라고 기대하며 신약 개발의 핵심 요소로 삼고 있다.
짐 웨더럴(Jim Weatherall) 아스트라제네카(AstraZeneca) 데이터과학 및 AI 담당 부사장은 AI를 활용한 덕분에 인터넷에서 수많은 생물의학 데이터를 수집 및 분석하는 방식으로 연구진이 고려하지 않았을 법한 몇 가지 약물 표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정말 큰 변화가 생겼다”라며 “그 누구도 수백만 개의 생물학 논문을 읽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웨더럴은 이 기술을 통해 최근 연구 결과와 10년 동안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연구 결과 사이의 연관성을 밝혀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웨더럴은 “생물학자들은 연구 결과를 살펴보고 이 연관 관계가 타당한지 검토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적 식별 기술(target-identification technique)은 아직 초기 단계이다. 그는 이 기술을 통해 개발된 아스트라제네카의 약물이 임상시험에 들어가기까지 ‘수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표적 선택은 시작에 불과하다. 더 큰 과제는 표적에 작용할 약물 분자를 설계하는 것이며, 대부분의 혁신이 바로 이 지점에서 탄생한다.
체내에서 분자 간 상호 작용은 매우 복잡하다. 약물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일단 약물이 분해되지 않고 흡수되어야 한다. 이 모든 반응은 원자 단위에서 물리적, 화학적 법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AI 기반 약물 설계 접근법의 목표는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최대한 유리한 특징을 지닌 새로운 분자를 신속히 찾아내는 것이다.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소재하며 플래그십 파이오니어링의 지원을 받고 있는 스타트업 제너레이트 바이오메디슨(Generate Biomedicines)은 DALL-E 2와 같이 텍스트 기반 이미지 생성(text-to-image) AI를 이용해 이를 실현하려고 한다. 제너레이트의 소프트웨어는 이미지 픽셀이 아닌 아미노산 가닥을 가지고 작업한다. 임의의 아미노산 배열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어 특정 속성을 지닌 단백질이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단백질의 기능은 입체적으로 어떻게 접히느냐에 따라 결정되므로 이를 이용해 특정 기능의 단백질을 설계할 수 있다.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의 데이비드 베이커(David Baker) 연구실을 비롯한 다른 연구팀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앱사이 역시 머신러닝을 이용하여 단백질 기반의 새로운 약물을 개발하고 있지만 이들의 접근법은 다르다. 앱사이가 다루는 것은 항체이다. 항체는 인체에서 세균, 바이러스 등 기타 외부 침입 물질을 제거하는 데 쓰이는 단백질이다. 앱사이는 실험실에서 얻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학습된 모델을 사용해 외부 물질에 달라붙는 항체 부위의 수많은 새로운 구조를 발견했다. 이들의 목표는 기존 항체를 다시 설계하여 표적에 더 잘 결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연구진은 시뮬레이션 상 가장 적합한 구조를 찾은 다음, 이 구조를 합성하여 시험한다.
머크(Merck)와 같은 대형 제약회사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앱사이는 지난 1월 기존의 여러 항체를 재설계하는 데 이러한 접근법을 사용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코로나19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인 SARS-CoV-2의 스파이크 단백질을 표적으로 하는 항체, 암세포 성장 인자를 차단하는 항체 등이 있었다.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플래그십 파이오니어링의 또 다른 자회사 에이프라이어라이 바이오(Apriori Bio) 또한 코로나바이러스의 다양한 변이에 대항할 수 있는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에이프라이어라이 바이오는 실험실에서 수백만 개의 바이러스 변이를 만들어 코로나바이러스 대항 항체가 항원에 얼마나 잘 결합하는지 시험한다. 그리고 이 중 가장 성능이 뛰어난 항체를 대상으로 머신러닝을 사용해 1해(1020) 가지가 넘는 변종에 대해 어떻게 작용할지 예측한다. 이들의 목표는 다양한 변이에 대항할 수 있는 항체 혹은 확산이 우려되는 특정 변종에 대항할 수 있는 항체를 찾아내어, 다양한 변종에 대항 가능한 백신을 개발하는 데 활용하는 것이다.
플래그십파이오니어링의 파트너이자 에이프라이어라이 바이오 CEO인 로비자 아프젤리우스(Lovisa Afzelius)는 “이 과정을 실험실에서 실제로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인간의 두뇌로는 이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전체 시스템을 파악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바로 이 점이 프라카시가 AI의 잠재력에서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부분이다. 미래 의약품 원료가 될 수 있으나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생물∙화학적 구조들로 구성된 거대한 풀을 AI로 분석하는 것이다. 프라카시에 의하면 머크, 노바티스(Novartis), 아스트라제네카를 비롯한 모든 대형 제약회사를 통틀어 약을 만들 수 있는 성분은, 매우 흡사한 분자들을 제외하고도 최대 천만 개에 달한다. 여기에는 지식재산권이 유지된 물질 및 공적 후보 물질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것이 바로 지난 100년간 수많은 화학자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목록이자 전 세계 과학자가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프라카시는 유기화학적 원리에 따라 약물이 될 수 있는 분자의 최대 경우의 수는 1,033개라는 점을 지적한다(어떤 연구진은 약물 유사 분자의 수가 이보다 많은 1,060개라고 추정한다). 프라카시는 “이 숫자를 천만 개와 비교하면, 기존의 상황은 넓은 바다 옆 조그마한 웅덩이에서 낚시하는 것보다도 나쁘다”고 비유했다. 그는 “그동안은 물방울 속에서 낚시해온 셈이다”라고 덧붙였다.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로 프라카시의 회사인 버시언은 과거에 사용하던 기술과 새로운 컴퓨터 기술을 총동원하여, 수백만 개의 후보 분자들을 만든 다음 이들의 속성을 시험하고 있다. 버시언은 체내 약물과 단백질 간의 상호 작용을 물리적 문제로 치환하여 분자가 서로 결합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는 원자들 사이의 인력과 척력을 시뮬레이션한다. 이러한 분자 시뮬레이션은 전에도 있었지만, 버시언은 AI를 사용해 분자의 상호 작용을 더욱 정확하게 모델링한다. 버시언은 현재까지 심혈관 질환, 전염병, 암을 포함한 다양한 질병에 대해 16개의 후보 약물을 만들었다. 그중 한 가지는 임상시험 중에 있으며 다른 몇 가지 약물도 곧 임상시험에 돌입할 예정이다.
결정적으로 연구진은 신약 개발 과정에 존재하는 수많은 번거로운 단계를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줄일 수 있다. 제약회사들은 특정한 성질을 지닐 것으로 예상되는 후보 분자 여러 가지를 생성한 다음 이를 차례로 시험한다. 하지만 머신러닝을 사용하면 분자의 기본 특성 중 원하는 것을 골라 AI를 통해 수학적으로 분석하여 화합물을 설계할 수 있다. 솔터-시드는 이 기술이 신약 개발 초기 단계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예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한 회사가 신약을 개발할 때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2,500~5,000개의 초기 후보 물질을 시험해 본다. 반면 엑사이언티아는 단 1년 동안 136개의 화합물만을 실험하여 새로운 신약 후보를 선정했다.
웨더럴은 “머신러닝으로 탐색 속도를 높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제 분자를 실제로 만들지 않고도 점점 더 많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덧붙였다.
어떤 약이든 개발 과정에는 임상시험을 거쳐야 한다. 신약 개발의 마지막 관문에 해당하는 이 단계에서는 수많은 지원자를 모집해야 하며, 이는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10년에서 최대 20년까지 걸릴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많은 약물이 수년에 걸려 이 단계에 도달하고도 결국 실패한다.
AI를 활용한다고 해도 임상시험 기간을 단축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AI로 신약 후보 물질을 찾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절약한다면, 제약회사가 더욱 유리한 조건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할 수 있다. 실험실에서 성공할 확률이 낮은 약물을 시험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은 다른 유망한 후보 물질이 임상시험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개발 단계에서의 비용이 줄어들면 회사는 초기에 두드러지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약이라도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않고 개발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약을 사용할 환자를 더 잘 선정하는 것 또한 신약 개발 과정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임상시험은 약이 효과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수를 집계하여 약의 평균적인 효과를 측정한다. 임상시험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일정 수준보다 높은 비율의 환자에서 약이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면 이 약은 임상시험에 성공한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약물이 소수의 환자에 효과가 있었다는 사실이 간과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웨더럴은 “이는 매우 조악한 방식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사실 우리가 임상시험을 통해 할 일은 해당 약물을 통해 가장 많이 개선될 수 있는 하위 환자군을 찾는 것인데도 말이다”라고 설명했다.
엑사이언티아의 약물 선정 기술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홉킨스는 “적절한 환자군을 선별할 수 있다면 제약 산업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약물 선정 기술은 폴과 같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약물에 효과를 보지 못하는 환자들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 엑사이언티아의 로는 “안타깝게도 일부 환자들은 효과가 있는 약을 찾을 때까지 수년 동안 병원을 들락거리며 효과 없는 약들을 쓰게 된다. 마침내 더는 쓸 약이 없을 때까지 말이다”라고 말한다.
엑사이언티아는 폴에게 효과가 있는 약물을 발견한 후 후속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은 암 환자 가운데 최소 두 차례 항암제 치료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환자 수십 명을 선정했다. 그리고 이 환자들로부터 조직 표본을 채취하여 139개의 기존 약물이 환자의 세포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엑사이언티아는 이들 중 절반 이상에서 효과가 있는 약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제 엑사이언티아는 이 기술을 사용하여 환자 데이터를 신약 개발 초기 단계에 통합해 더욱 개선된 AI를 훈련시키는 접근법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홉킨스는 “질병 모델에서 시작하는 대신 환자의 조직으로부터 신약 개발을 시작할 수 있다”라며 “신약 개발에서 최고 모델은 바로 환자 그 자신이다”라고 강조한다.
현재 AI가 설계한 첫 약물들이 임상시험의 험난한 과정을 통과하고 있다. 이 약들이 임상시험을 통과하여 시장에 출시되기까지는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수 있다. 또 일부는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기 그룹이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그룹이 등장할 것이다. 약물 설계는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 비네쉬는 “이 약들은 제약회사들이 시도하는 첫 번째 약물일 뿐이다. 최고의 약은 그다음에 나올 수 있다”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일부 환자들은 효과가 있는 약을 찾을 때까지 수년 동안 병원을 들락거리며 효과 없는 약들을 쓰게 된다. 마침내 더는 쓸 약이 없을 때까지 말이다.”
*윌 더글러스 헤븐(Will Douglas Heaven)은 MIT 테크놀로지 리뷰의 AI 수석 편집자다.

<MIT 테크놀로지 리뷰> 매거진
포스트 디자인 씽킹 (Volume 7)
본 기사는 <MIT 테크놀로지 리뷰> 매거진 2023년 3·4월 호에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