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맞춤형 아기’를 뛰어넘는 크리스퍼 유전자 편집 기술
유전자 편집 아기를 탄생시켰던 중국의 과학자 허젠쿠이(He Jiankui)는 잊어라. 대신 아프리카계 미국인 빅토리아 그레이(Victoria Gray)를 기억하자. 그녀는 유전자 편집으로 겸상적혈구증을 치료받은 환자다.
2023년 3월 영국 런던에서 인간 게놈 편집에 관한 제3차 국제 서밋(The third international summit on human genome editing)이 열렸다. 유전자 편집 분야에 있어 대대적인 행사인 이곳에서 연구자들은 새로운 DNA 변형 기술을 발표하고 청중은 감탄하며, 윤리학자들은 신기술의 영향에 대한 더욱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행사에서는 2018년 중국에서 유전자 편집 기술을 ‘오용’하여 맞춤형 아기(designer-baby)를 만들었던 일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당시 이 사건은 엄청난 윤리적 파장을 일으켰고 인간이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에 개입하는 문제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맞춤형 아기 논쟁은 실제로 유전자 편집 기술을 통해 심각한 질환을 치료받고 인생이 달라진 사람들의 사연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의 유전자 편집 기술 전문가 데이비드 리우(David Liu)가 MIT 테크놀로지 리뷰에 공유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유전자 편집 기술을 사용하여 암을 포함한 HIV(사람면역결핍바이러스), 혈액 질환 등 각종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50건이 넘는 임상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약 40건의 연구가 크리스퍼(CRISPR)를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크리스퍼는 처음 개발된 지 불과 1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유전자 편집 기술 중에서 가장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빅토리아 그레이는 바로 이러한 사례의 주인공이다. 그레이는 지난 2019년 최초로 크리스퍼를 통해 병을 치료받았다. 그녀는 이번 회의에서 자신의 경험을 발표했는데 그녀의 이야기에 청중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레이가 앓았던 겸상적혈구증은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적혈구의 구조가 낫 모양으로 바뀌는 병이다. 이 병은 적혈구가 산소를 제대로 운반할 수 없기 때문에 환자에게 극심한 통증과 빈혈을 유발할 수 있다. 그레이는 자신의 투병기를 전하며 “나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로서 오늘 여러분 앞에 섰다”고 말했다.
한편 그레이의 사례는 ‘크리스퍼 1.0’이라고 불리는 1세대 크리스퍼 치료법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이 치료법은 매우 많은 비용이 들고 시술하기도 까다롭다. 또한 차세대 편집 약물로 곧 대체될 가능성도 있다.
그레이가 받은 치료법을 개발한 버텍스 제약사(Vertex Pharmaceuticals)는 겸상적혈구증과 관련 질환인 베타지중해빈혈 연구를 통해 75명의 환자를 치료했으며, 1년 내 미국에서 치료제 시판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많은 사람이 이 치료제가 크리스퍼를 사용한 최초의 시판 치료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버텍스는 구체적인 가격을 밝히지 않았지만, 대략 수백만 달러(수십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커다란 혁신
연구자들은 임상 분야에서 크리스퍼가 놀라운 속도로 빠르게 확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이하 UC 버클리)의 연구원인 표도르 우르노프(Fyodor Urnov)는 “크리스퍼가 이전의 모든 유전체 치료 기술을 앞질렀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크리스퍼는 유전체의 특정 지점을 자를 수 있다는 점에서 과학자들 사이에서 천기누설 수준의 혁신으로 여겨진다. 이 기술은 염기서열을 자르는 가위 역할을 하는 단백질과 마치 GPS처럼 염색체의 정확한 절단 부위를 찾아내는 짧은 유전자 서열이 짝을 이루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이 기술을 발명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상을 받은 UC 버클리의 생화학자 제니퍼 다우드나(Jennifer Doudna)는 ‘GPS 염기서열’을 바꾸기가 매우 쉽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 회의에서 “크리스퍼는 기존 DNA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술이다”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현재 버텍스뿐만 아니라 인텔리아(Intellia), 빔 테라퓨틱스(Therapeutics), 에디타스 메디슨(Editas Medicine) 등 수많은 바이오테크 회사가 이 기술을 활용한 치료법 개발에 성공하길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 다수가 리우가 언급한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임상시험이 성공을 거두지는 못할 것이다.
한 예로 2023년 1월 샌프란시스코의 바이오테크 회사 그래파이트 바이오(Graphite Bio)는 겸상적혈구증 유전자 편집 치료제 임상시험 중 첫 환자의 혈구 수치가 위험 수준까지 떨어져 시험을 중단해야 했다. 문제의 원인은 치료법 자체에 있었다. 그래파이트의 주가는 90% 이상 폭락해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말았다.
크리스퍼 유전자 편집 치료제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소는 체내 정확한 지점에 치료제가 도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레이의 경우에는 먼저 골수세포를 채취한 뒤 이를 실험실에서 편집하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그녀는 편집한 세포를 다시 몸에 이식하기 전, 새로운 세포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남은 골수를 죽이는 혹독한 화학요법을 받았다.
LLUIS MONTOLIU
버텍스에서 개발한 치료법은 실질적으로 골수 이식을 해야 한다. 골수 이식은 그 자체로 시련이고 모든 환자가 이식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버텍스는 이 치료법이 ‘중증’ 환자들에게 적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약 3만 2,000명의 환자가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보험사와 정부가 치료비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환자들은 이 치료를 받을 수 없다. 이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문제다. 과거 블루버드 바이오(Bluebird Bio)가 개발한 베타지중해빈혈 유전자 치료제는 유럽 정부가 180만 달러(약 23억 6,000만 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급하지 않자 유럽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크리스퍼 2.0
1세대 크리스퍼 치료제의 한계는 또 있다. 이 기술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본질적으로 DNA를 손상시켜 유전자의 발현을 차단한다. 이 원리는 하버드 대학교의 생물학자 조지 처치(George Church)가 ‘유전체 파괴(genome vandalism)’라고 표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처럼 유전자를 파괴하는 치료법 중에는 HIV를 제거하기 위해 고안된 치료법이 있다. 그레이가 받은 치료도 마찬가지다. 그레이가 받은 치료는 특정 DNA 부위를 파괴하여 원래 유아기에만 존재하는 헤모글로빈 유전자를 재활성시킨다. 겸상적혈구증은 헤모글로빈 단백질에 문제가 생긴 것이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헤모글로빈을 활성화시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리우의 분석에 의하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임상 연구의 3분의 2가량이 이처럼 유전자 ‘파괴’ 방식을 사용한다.
리우의 연구실에서는 차세대 유전자 편집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이 기술 역시 크리스퍼 단백질을 사용한다. 하지만 DNA 이중나선을 자르지 않고도 개별 유전자를 교묘하게 바꾸거나 더 큰 범위에 걸쳐 편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기술은 ‘염기 편집기(base editors)’라고 알려져 있다.
스페인 국립생명공학센터(CNB)의 유전학자 루이스 몬톨리우(Lluís Montoliu)는 차세대 크리스퍼에 대해 “신체의 올바른 표적 세포에 치료제가 도달하게 만드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위험성이 낮고 성능은 더 뛰어나다”고 말했다.
몬톨리우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태어날 때부터 백색증을 앓고 있는 쥐를 염기 편집기를 이용해 치료하고 있다. 그는 이 연구가 훗날 신생아를 치료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환자의 피부색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백색증으로 인한 심각한 시력 저하 문제를 고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백색증 치료 프로젝트는 아직 상업 벤처가 아니다. 바로 이 점이 앞으로 크리스퍼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벽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진행 중인 거의 모든 크리스퍼 연구는 암이나 겸상적혈구증 치료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여러 회사가 정확히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우르노프에 따르면 이는 크리스퍼로 치료할 수 있는 수천 가지 유전 질환이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너무 드문 질환은 상업적으로 개발될 기회조차 없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 런던 회의에서 우르노프는 환자가 단 한 명뿐인 매우 드문 유전 질환을 포함해 각종 희소병에 대해서도 치료법을 시험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아이디어를 발표하였다.
그가 제안한 방식이 상업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유전체의 어디든 편집할 수 있는 크리스퍼의 특성상 과학적으로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 우르노프는 유전자 편집 기술을 활용한 치료법이 첫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이제 “모두를 위한 치료법으로 하루빨리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