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마 모방한 ‘뇌 전극’, 뇌 손상 환자 기억력 회복에 효과
뇌 손상 환자들의 뇌심부에 ‘전극(electrode)’을 삽입해서 우리 뇌가 기억을 만드는 방식대로 뇌에 자극을 줬더니 새로운 정보를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 ‘기억력 보조장치(memory prosthesis)’가 기억장애를 앓는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지만 기억력이 저하된 사람에게는 더 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남으로써 향후 이 기술을 발전시키면 뇌 손상, 노화, 알츠하이머 같은 퇴행성 질환으로 기억상실증을 앓는 환자들 치료에도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USC)의 테오도르 베르거(Theodore Berger)와 동 송(Dong Song) 등의 연구진은 뇌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기억 및 학습과 관련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해마에서 일어나는 메커니즘을 모방했다.
바다 동물 해마와 비슷하게 생긴 신체 기관인 해마는 단기 기억 형성을 돕고 장기 기억의 저장을 위해 기억을 뇌의 다른 영역으로 유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구진은 해마의 이러한 과정을 10여 년 전부터 연구해왔다.
기억 모방하기
연구진은 뇌 전극을 이용해서 기억이 저장될 때 일어나는 활동의 전기적 패턴을 파악한 다음 동일한 전극을 통해 유사한 활동 패턴을 일으켜봤다. 연구진은 동물은 물론이고 이미 뇌에 전극을 심어놓은 간질 환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버전의 전극을 테스트했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연구진과 별도로 노스캐롤라이나 웨이크포레스트 의과대학(Wake Forest University School of Medicine)의 신경과학자 롭 햄슨(Rob Hampson)과 동료들은 전극이 기억력이 저하된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간질 연구 목적으로 뇌에 전극을 심은 24명을 대상으로 두 가지 모델의 전극을 시험했다. 피험자들 중 일부는 뇌 손상을 입은 환자들이었다.
연구진이 ‘기억 변환모델(memory decoding model, MDM)’이라고 명명한 첫 번째 유형의 전극은 각각의 피험자가 성공적으로 기억을 형성할 때 해마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전기 활성 패턴을 모방한다. MDM 모델은 개인들의 패턴을 기반으로 평균적인 패턴을 알아낸 다음에 그 패턴에 따라서 전기 자극을 활성화하는 방식이다.
‘다중 입력, 다중 출력(multi-input, multi-output, MIMO)’이라고 불리는 두 번째 유형의 전극은 해마를 더 구체적으로 모방한다. 건강한 사람의 해마에서는 전기 활성이 뇌의 다른 영역으로 퍼지기 전 한 층에서 다른 층으로 흐른다. MIMO 모델은 기억 저장 과정에 해당하는 전기적 입력 및 출력 패턴을 학습한 다음 이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고유한 뇌
햄슨과 동료들은 두 유형의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보기 위해서 피험자들에게 기억력 테스트를 진행했다. 테스트에서 각 피험자는 모니터에 띄워진 이미지를 본 다음, 얼마 후 이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들과 함께 눈으로 보았다. 이때 피험자들은 앞서 보았던 이미지가 무엇인지 골라야 했다. 각 피험자는 단기 기억을 테스트하기 위해 이와 같은 테스트를 100~150회 정도 반복했다.
15~90분 후 피험자들은 두 번째 테스트를 치렀다. 이번에는 이미지 세 개 중에서 가장 친숙한 것을 고르는 것이었다. 이것은 장기 기억을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피험자들은 두 단계의 테스트를 두 차례 반복했다. 첫 번째는 해마로부터 전기 활성 패턴을 기록하기 위해, 두 번째는 이 기록된 패턴을 기억 저장 과정에서 시험해보기 위해서였다. 햄슨은 “이러한 전기 활성 패턴이 사람마다 달랐다”며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사람마다 자신만의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전극이 피험자의 기억력 테스트 성과를 개선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미지를 처음 봤을 때 뇌가 올바른 패턴의 자극을 받으면 테스트 점수는 현저히 높았다. 햄슨은 “이는 이 기억력 보조장치가 기억 저장을 돕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기억력은 11%에서 54% 정도 개선됐다”고 설명했다.
조시 제이콥스(Josh Jacobs) 컬럼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 교수는 이러한 방식으로 맞춤형 뇌 자극을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는 이번 연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간질 환자의 기억 저장을 연구하고 있다. 현재까지 의사와 과학자들은 단순히 모든 개인들의 동일한 뇌 부위를 표적화하는 방식만으로도 파킨슨병과 같은 장애를 치료하는 데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제이콥스는 “사람마다 뇌 반응은 천차만별”이라며 개개인의 뇌에 자극을 맞춤화하면 더욱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해마와 더욱 흡사하게 만든 MIMO 모델은 대체로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테스트 초반 가장 기억력이 저조했던 사람들에게서 이 모델의 효과가 가장 뛰어났다. 연구진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지만, 햄슨은 이러한 결과가 뇌 손상이 심한 사람일수록 개선의 여지가 많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했다.
모든 피험자는 2주 뒤 의사가 간질과 관련된 검사를 마친 후 전극을 제거했다. 하지만 송은 기억력의 개선이 전극을 제거한 후에도 지속되길 바라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동안 가해진 전기 자극으로 인해 해마의 뉴런 연결이 강화되었을 수 있다. 그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지는 아무도 정말 모르지만 우리는 그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기억력 회복하기
송, 햄슨과 동료들은 지난 7월 그들의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프론티어스 인 휴먼 뉴로사이언스(Frontiers in Human Neuroscience)>에 발표했다. 언젠가 그들은 기억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기억력을 되살리는 데 기억력 보조장치를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송은 “뇌 손상 환자들이 첫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뇌 부상은 뇌의 특정 구역에 영향을 주는 경향이 있다. 가령 알츠하이머성 치매처럼 뇌의 많은 부위에 걸쳐 손상이 일어나는 퇴행성 질환에서보다는 해마 손상 환자에서 이 치료를 적용하기가 더 용이할 것이다.
제이콥스는 “언젠가 우리는 해마를 다른 무엇인가로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건강한 해마의 기능을 완전하게 복제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해마는 수없이 많은 뉴런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뇌의 해마에 집중되어 있는 수백만 개의 뉴런들을 단지 전극 다발로 대체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에서 사용된 전극들은 몇 밀리미터 크기로, 모든 피험자는 해마가 위치한 약 10센티 정도 깊이에 전극을 삽입했다. 이는 현시대의 연구 기준으로도 그렇게 정밀하지는 않은 수준으로, 오직 40개에서 100개 뉴런의 활성만을 저장할 수 있었다. 기억장애 치료 목적으로 기억력 보조장치를 설계한다면, 수백에서 수천 개에 달하는 뉴런에 기억 저장 및 자극 전달을 위한 수백 개의 접촉점을 지닌 뇌 전극이 필요할 것이다.
햄슨과 송의 연구는 전극을 실제로 어떻게 활용할지를 탐구하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 장치를 언제나 작동시키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예를 들어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처럼 기억장애를 겪는 사람들이라도 애써 기억할 필요가 없는 일상적 경험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제이콥스는 “이러한 기억들로 뇌의 공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송은 기억력 보조장치가 작동 여부를 스스로 판단하는 기능을 갖추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뇌가 학습 준비 상태에 있는 때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장치가 수면 중에도 작동해야 할지에 대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우리가 잠을 잘 때 해마는 뇌의 다른 영역에 기억을 통합하기 위해서 낮에 저장된 기억들을 다시 활성화시킨다. 송과 동료들은 되새김질을 복제하는 전극이 기억력을 향상시키는지, 혹은 사람이 잠을 자는 동안 해마를 자극하는 방식이 바람직한지 여부는 아직 알지 못한다.
샤피로는 “어떤 식으로든 기억력 보조장치가 임상 현장에서 사용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면서 “이것의 미래는 밝아 보이지만 해마의 기능을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기억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