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bpx

KAIST, 비타민 A 물질로 면역세포 탈진 막아…난치 뇌종양 치료 새 전략

암과 오래 싸워 지친 면역세포가 완전히 탈진하는 것을 비타민 A 유래 물질로 막는 원리를 밝혔다. 기존 면역항암제가 잘 듣지 않던 난치성 뇌종양 치료의 새 전략이다.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다 지쳐버린 면역세포가 완전히 기능을 잃는 ‘탈진’을, 비타민 A에서 유래한 물질로 막을 수 있다는 원리가 규명됐다.

KAIST는 생명과학과 이흥규 교수 연구팀이 서울성모병원·건양대학교 의과대학과 공동으로, 활성형 비타민 A 대사체인 ‘올트랜스 레티노산(ATRA)’이 암세포를 직접 파괴하는 핵심 면역세포 CD8 T세포의 ‘말기 탈진’을 억제하고, 대표적 면역항암제인 항-PD-1의 치료 효과를 높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8일 밝혔다.

이 성과가 주목받는 배경에는 면역항암 치료의 오랜 한계가 있다. 교모세포종은 수술·방사선·항암치료 후에도 재발이 잦은 난치성 뇌종양으로, 면역항암제를 써도 효과가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종양 안으로 들어간 면역세포가 암세포와 오래 싸우면서 점차 기능을 잃기 때문이다. 특히 CD8 T세포가 체력을 모두 소진한 병사처럼 ‘말기 탈진’ 상태에 이르면, 암세포가 면역세포에 건 ‘브레이크’를 풀어주는 항-PD-1을 써도 충분한 효과를 얻기 어렵다.

연구팀은 이미 지친 세포를 다시 깨우는 대신, 애초에 완전히 지치지 않도록 지키는 새로운 접근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연구는 국제학술지 ‘신호전달 및 표적치료’에 지난달 게재됐다.

브레이크를 풀어도 지친 세포는 싸우지 못한다

우리 몸의 면역 시스템에서 암세포를 직접 죽이는 핵심 병력이 ‘CD8 T세포’다. 종양 안으로 침투해 암세포를 사멸시키고, 다른 면역세포를 부르는 신호물질도 내보낸다. 문제는 이 세포가 종양이라는 가혹한 환경에서 점차 지친다는 데 있다. 암세포와 장기간 접촉하고, 산소가 부족하며, 면역을 억제하는 물질이 가득한 환경에 노출되면 CD8 T세포는 서서히 기능을 잃는다. 이를 ‘T세포 탈진’이라 부른다.

특히 여러 탈진 신호가 한꺼번에 나타나는 ‘말기 탈진’ 상태에 이르면, 암세포를 죽이는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최전선에서 오래 싸우다 체력이 완전히 방전된 병사와 같은 상태다. 이 지점이 최근 면역치료의 결정적 장벽으로 지목돼 왔다.

최근 각광받는 면역항암제인 항-PD-1은 암세포가 면역세포에 거는 ‘브레이크’를 풀어주는 방식이다. 하지만 세포가 이미 말기 탈진에 빠져 있으면 브레이크를 풀어줘도 다시 힘을 내지 못한다. 교모세포종에서 항-PD-1이 잘 듣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억제 신호를 차단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세포가 애초에 탈진으로 진행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전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연구이미지 | AI 생성

지친 세포 깨우기보다 ‘지치지 않게’

연구팀의 발상 전환은 ‘이미 지친 세포를 되살리기’가 아니라 ‘처음부터 완전히 지치지 않게 하기’였다. 이를 위해 세포의 성장과 분화, 면역 기능을 조절하는 활성형 비타민 A 대사체 ATRA에 주목했다. ATRA는 비타민 A가 몸속에서 실제 기능을 하는 형태로 바뀐 물질이다.

실험실에서 산소가 부족하고 암세포와 오래 접촉하는 뇌종양 환경을 재현하자, ATRA에 노출된 CD8 T세포는 말기 탈진으로 진행하는 비율이 뚜렷하게 낮았다. 또 인터루킨-2, 인터페론 감마, 종양괴사인자 알파처럼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공격하는 데 필요한 신호물질을 더 잘 만들어냈고, 암세포를 죽이는 능력도 유지했다.

원리도 규명됐다. ATRA는 CD8 T세포 안에서 세포의 성장과 기능 유지를 조절하는 내부 신호체계인 ‘WNT/β-카테닌 신호’를 활성화하고, 면역세포가 오래 기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TCF-1 단백질을 늘렸다. 쉽게 말해 세포 내부의 ‘기능 유지 스위치’를 켜, 오래 싸워도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지 않게 돕는 것이다. β-카테닌을 억제하면 ATRA의 효과가 사라진 점이, 이 신호축이 핵심임을 뒷받침했다.

면역항암제와 병용 시 재발 뇌종양까지 억제

생쥐 뇌종양 모델에서도 효과가 확인됐다. ATRA로 조절한 CD8 T세포는 종양 안에서 기능을 더 잘 유지했고, ATRA를 먹이는 것만으로도 종양 속 CD8 T세포의 수와 기능이 늘었다. 그 결과 종양의 크기와 양을 뜻하는 ‘종양 부담’이 줄고 생존 기간도 늘어났다. CD8 T세포를 제거하면 ATRA의 치료 효과가 사라져, 이 효과가 CD8 T세포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도 확인됐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병용 효과다. 재발성 뇌종양에서 항-PD-1만 썼을 때는 효과가 제한적이었지만, ATRA와 항-PD-1을 함께 쓰자 종양 억제와 장기 생존 효과가 크게 향상됐다. 항-PD-1이 면역세포에 걸린 브레이크를 풀어주는 치료라면, ATRA는 면역세포의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해 서로 상승 작용을 낸 것이다. 사람 교모세포종 환자 데이터 분석에서도, 레티노산에 반응하는 유전자 발현이 높은 환자군에서 면역세포의 탈진 정도가 낮고 생존 결과가 더 좋은 경향이 나타났다.

실용화 관점에서 ATRA는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이미 급성 전골수구성 백혈병 치료에 오래 쓰여 사람에서의 안전성 정보가 축적돼 있어, 기존 약물의 새 쓰임을 찾는 ‘신약 재창출’ 관점에서 진입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다. 다만 연구팀은 이번 연구가 환자를 대상으로 치료 효과를 직접 입증한 것은 아니며, 실제 뇌종양 치료에 적용하려면 적절한 투여 방법과 용량, 면역항암제와의 병용 효과 등을 확인하는 추가 임상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흥규 교수는 “활성형 비타민 A 신호가 CD8 T세포의 말기 탈진을 막고 항암 기능을 유지하도록 돕는 분자 원리를 밝혔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정밀한 전달 방식과 병용치료 전략을 검증한다면 난치성 뇌종양의 면역치료 반응을 높이는 새로운 접근법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강인 박사후연구원이 제1저자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