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IST, 빛의 ‘좌우 회전’ 읽는 고성능 광검출기…자율주행·의료영상 길 연다
왼쪽으로 도는 빛과 오른쪽으로 도는 빛을 가려내는 고성능 근적외선 광검출기가 개발됐다.
UNIST 화학과 김봉수 교수와 서울대학교 오준학 교수 연구팀은 좌우 대칭이 깨진 ‘키랄(chiral)’ 유기반도체 박막을 수직형 트랜지스터 구조에 적용해, 근적외선 영역에서 지금까지 보고된 것 중 가장 우수한 원편광 검출기를 만들었다고 23일 밝혔다.
빛은 밝기와 색(파장)뿐 아니라 나선처럼 회전하는 방향에도 정보를 담는데, 이 회전을 읽어내는 능력은 사물의 형태를 넘어 재질까지 구분하는 자율주행 센서나 DNA·단백질 같은 생체 분자를 들여다보는 바이오이미징의 핵심이 된다. 문제는 그동안 근적외선 대역에서 이 좌우 회전을 제대로 가려내는 소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연구팀은 소재 자체를 바꾸는 대신, 이미 만든 박막을 적절한 온도로 굽는 ‘열처리’만으로 성능을 3배 높이는 길을 찾아냈다. 이번 연구는 국제 학술지 《어드밴스드 사이언스(Advanced Science)》에 6월 28일 온라인 게재됐다.
빛의 회전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왜 지금까지 어려웠나
우리가 흔히 아는 빛은 세기와 색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빛에는 하나의 정보가 더 있다. 진행하면서 전기장이 나선을 그리며 도는 ‘원편광(circularly polarized light)’이다. 회전 방향에 따라 왼쪽으로 도는 좌원편광, 오른쪽으로 도는 우원편광으로 나뉜다. 이 회전 정보를 읽어내면 사물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표면의 성질, 물질의 종류까지 구별할 수 있어 3D 디스플레이, 보안 인증, 광통신, 의료영상 등에 두루 쓸 수 있다.
특히 근적외선(NIR)은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으로, 생체 조직과 대기를 잘 통과하는 성질이 있다. 사람 몸속을 들여다보는 의료영상이나, 안개·어둠 속에서도 작동해야 하는 자율주행 센서에 이상적인 빛이다. 근적외선의 회전 방향까지 읽어낼 수 있다면, 자동차가 앞에 있는 것이 사람인지 마네킹인지, 젖은 노면인지 마른 노면인지를 재질 단위로 구분하는 일도 가능해진다.
그런데 일반 광검출기는 빛의 회전 방향을 전혀 구분하지 못한다. 좌원편광이 오든 우원편광이 오든 똑같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를 구별하려면 좌우 대칭이 깨진 특수 소재, 즉 ‘키랄 분자’가 필요하다. 키랄 분자는 오른손과 왼손처럼 거울에 비친 모습과 겹쳐지지 않는 비대칭 구조를 가져, 좌원편광과 우원편광을 서로 다르게 흡수한다. 덕분에 별도의 편광 광학 부품 없이도 빛의 회전 방향을 직접 가려낼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이 비대칭 구조가 성능의 발목을 잡는다는 데 있다. 키랄 분자는 형태가 비틀려 있어, 박막(얇은 막)으로 만들면 분자들이 차곡차곡 정렬되지 못하고 성기게 쌓인다. 분자 배열이 흐트러지면 전기가 잘 흐르지 못해 검출 성능이 떨어진다. 잘 구분하는 소재는 전기적으로 약하고, 전기가 잘 통하는 소재는 회전을 잘 못 가리는 딜레마가 계속돼 왔다. 그 결과 근적외선 원편광 검출 성능은 오랫동안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연구팀은 이 딜레마를 새 물질을 합성하는 대신 ‘후처리’로 풀었다. 나선형 비대칭 구조를 가진 유기반도체 분자의 끝에 불소(F) 또는 염소(Cl)를 붙인 뒤, 이 박막을 다양한 온도로 굽는 열처리를 시도한 것이다. 이미 만들어진 막을 데워 분자들이 스스로 더 질서 있게 다시 쌓이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굽는 온도가 성능을 3배로, 회전 방향까지 뒤집었다
열처리의 효과는 뚜렷했다. 분자 끝에 불소를 붙인 박막을 250도까지 가열하자, 좌우 편광을 구분하는 능력을 나타내는 원편광 흡수 선택성 값이 열처리 전 약 0.03에서 약 0.1로 3배 이상 높아졌다. 열을 받은 분자들이 성기게 쌓인 ‘3차원 벌집형’ 구조에서 조밀하고 질서 있는 ‘준2차원 평면형’ 구조로 재배열되면서, 흐트러졌던 분자들이 단결정처럼 규칙적으로 정돈된 결과다.
이 재배열이 실제로 일어났음은 여러 분석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같은 분자로 단결정(원자가 완벽하게 규칙적으로 배열된 이상적 결정)을 직접 키워 X선으로 그 배열을 들여다봤는데, 열처리한 박막의 광학 신호가 이 단결정의 신호와 같은 특징을 보였다. 고온으로 구운 박막이 단결정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정돈됐다는 뜻이다. 원자힘현미경(AFM·미세한 탐침으로 표면을 훑어 나노미터 단위 요철을 읽는 현미경)과 방사광 X선 산란(GIWAXS·X선을 얕은 각도로 쏘아 박막 내부 분자 배열을 분석하는 기법) 분석도 같은 결론을 뒷받침했다.
흥미로운 점은 열처리가 단순히 성능만 키운 게 아니라, 박막이 더 잘 흡수하는 회전 방향 자체를 반대로 뒤집었다는 것이다. 불소 치환 분자는 180도 부근에서 신호 방향이 뚜렷하게 뒤바뀌었다. 열을 받은 분자들이 다른 적층 구조로 다시 쌓이면서, 박막 전체가 그리는 나선의 방향이 통째로 역전됐기 때문이다. 굽는 온도라는 손잡이 하나로 좌우 편광 선택성의 세기뿐 아니라 방향까지 조절할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반면 분자 끝에 염소를 붙인 박막은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약 150도를 넘어서면 구조 변화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열처리 후 오히려 원편광 흡수 선택성이 낮아졌다. 같은 열을 가해도 분자 말단에 무엇을 붙였느냐에 따라 결과가 갈린 것이다. 연구팀은 이로써 ‘분자 말단의 원자 종류’와 ‘열처리 온도’라는 두 조건이 박막의 분자 배열과 편광 선택성을 어떻게 바꾸는지 규명하고, 고성능 키랄 광전자소자를 만들기 위한 박막 후처리 기준을 제시했다.
정돈된 박막은 소자 구조와 만나 성능이 완성됐다. 연구팀은 좌우 편광 흡수 차이로 생긴 미세한 전류 차이를 증폭하기 위해 이 박막을 ‘수직형 트랜지스터’에 적용했다. 수직형은 전류가 흐르는 통로 길이가 박막 두께만으로 정해져 매우 짧고, 분자가 쌓인 방향과 전류가 흐르는 방향이 일치해, 빛으로 생긴 전하를 빠르게 모아 증폭할 수 있다. 그 결과 850나노미터 근적외선에서 광전류 비대칭 지수 약 0.1, 미세한 빛을 잡음과 구별하는 비검출능 4.9×10¹¹ 존스, 빛을 100배 넘게 증폭하는 외부양자효율 최대 909%, 응답 속도 약 600마이크로초를 기록했다. 모두 기존 근적외선 원편광 검출기 중 최고 수준으로, 연구팀은 이 기술이 자율주행 센서, 바이오이미징, 광통신, 보안 인증 등 편광 정보를 정밀하게 읽어야 하는 차세대 광전자 기술의 상용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