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ST, 혈액 정화로 암 전이 차단 도전…종양 공격 넘어선 새 치료 개념
환자의 혈액을 몸 밖으로 순환시켜 암 전이를 촉진하는 물질을 걸러낸 뒤 다시 몸속으로 돌려보내, 암이 다른 장기로 퍼지는 것을 막는 치료기술 개발이 추진된다.
UNIST는 ‘항종양 혈액정화기술 연구단’이 보건복지부·한국보건산업진흥원 K-헬스미래추진단이 전담하는 한국형 ARPA-H 프로젝트에 선정됐다고 2일 밝혔다. 한국형 ARPA-H는 기존 방식으로 풀기 어려운 보건의료 난제를 대상으로, 실패 위험이 크더라도 혁신적인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국가 사업이다. 이 연구가 주목받는 이유는 암을 다루는 관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암 치료는 원발 종양(처음 생긴 암 덩어리)을 제거하거나 이미 퍼진 암세포를 공격하는 데 집중돼 왔다. 하지만 암세포가 이동해 다른 장기에 자리 잡는 ‘전이’ 과정을 미리 차단하는 방법은 부족했다. 특히 대장암은 다른 장기로 전이되면 치료가 어려워지고 생존율도 크게 낮아진다.
연구단은 종양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암이 퍼져 나갈 ‘길목’인 혈액을 정화해 전이의 연결고리를 끊는 전략을 택했다.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강주헌 교수가 총괄연구책임자를 맡아 약 4년 반 동안 정부지원금 약 80억 원을 투입해 연구를 수행한다.
종양을 공격하는 대신 ‘전이의 길목’을 막는다
암이 무서운 이유의 상당 부분은 ‘전이’에 있다. 처음 생긴 자리에만 머무는 암은 수술로 제거할 수 있지만, 암세포가 혈액을 타고 다른 장기로 옮겨가 새로 뿌리내리면 치료가 급격히 어려워진다. 대장암 역시 다른 장기로 전이되는 순간 생존율이 크게 떨어진다.
문제는 현재의 치료 전략에 빈틈이 있다는 점이다. 기존 치료는 원발 종양을 제거하거나 이미 퍼진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두 방식 모두 ‘이미 생긴 암’을 겨냥하는 것으로, 암세포가 이동해 다른 장기에 정착하는 과정 자체를 미리 막는 접근은 아니다. 전이가 진행되기 전에 그 흐름을 끊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연구단이 겨냥한 것이 바로 이 빈틈이다. 핵심 도구는 ‘체외 혈액정화’다. 환자의 혈액을 몸 밖으로 순환시키면서, 전이를 촉진하는 물질과 신호를 골라 제거한 뒤 정화된 혈액을 다시 몸속으로 돌려보내는 개념이다. 신장 기능이 떨어진 환자의 혈액을 걸러주는 투석과 비슷한 방식을, 암 전이 차단에 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발상의 핵심은 혈액을 ‘암세포의 이동 통로’로 본다는 데 있다. 강주헌 교수는 “암 환자의 혈액은 암세포의 이동 통로일 뿐 아니라 전이를 촉진하는 다양한 물질이 오가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암세포가 다른 장기에 자리 잡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기 전에, 그 환경을 조성하는 물질들을 혈액에서 걸러내 전이의 연결고리를 끊겠다는 것이다.
감염병 잡던 혈액정화 기술, 암 전이 막기에 쓴다
이 도전의 출발점은 전혀 다른 질환에 있다. 강 교수 연구팀이 그동안 패혈증 치료를 위해 개발해 온 혈액정화 기술이다. 패혈증은 혈액에 병원체와 염증성 물질이 퍼져 온몸에 문제를 일으키는 위중한 감염 질환인데, 연구팀은 혈액 속 병원체와 염증성 물질을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큰 동물을 이용한 전임상 패혈증 모델에서 유효성을 검증한 바 있다.
이번 과제는 이 기술을 감염 질환에서 암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혈액 속에서 특정 유해 물질을 골라 걸러내는 원리는 같지만, 걸러내는 대상을 병원체에서 암 전이 촉진 물질로 바꾸는 셈이다. 이미 검증된 기술의 적용 범위를 넓힌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기술을 처음부터 만드는 것보다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접근이다.
적용 대상도 구체적이다. 연구단은 수술 후 재발 위험이 높거나 전이 가능성이 큰 대장암 환자에게 쓸 수 있는 치료법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특히 기존 항암 치료와 병행했을 때 새로운 전이와 이미 퍼진 암의 추가 성장을 억제할 수 있는지를 확인한다. 기존 치료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방식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다만 이번 발표는 치료법이 완성됐다는 것이 아니라 연구 과제에 선정돼 개발을 시작한다는 단계임을 짚어둘 필요가 있다. 연구단은 대장암을 시작으로 여러 전이성 암에 적용할 수 있는 혈액정화 의료기기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최종적으로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초기 임상시험인 ‘탐색 임상’ 진입을 겨냥한다. 연세대 의과대학과 분당서울대병원이 암 전이 기전과 임상 적용 연구를, 여러 기업이 기기 생산과 인허가, 안전·성능 평가를 나눠 맡는다. 강 교수는 “연구 개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최종 단계에서 환자에게 적용할 수 있는 혈액정화 의료기기로 발전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