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연·충북대, 패혈증 치명도 가르는 ‘장내 숨은 범인’ 찾아…감염 예측·예방 새 길 열어
같은 균에 감염돼도 누구는 가볍게 회복하고 누구는 생명이 위급해진다. 그 차이가 장 속에 사는 미생물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사실이 한국 연구진에 의해 세계 최초로 규명됐다.
패혈증은 세균 감염에 맞서야 할 면역계가 통제 불능 상태로 폭주해 정상 장기까지 파괴하는 치명적 질환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은 감염병연구센터 서휘원·류충민 박사 연구팀이 충북대학교 김두진 교수팀과 공동연구를 통해 장내 특정 미생물이 면역 세포를 미리 예민한 상태로 만들어 패혈증을 치명적으로 악화시킨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고 22일 밝혔다.
유전적으로 동일한 실험쥐라도 장내 미생물이 다르면 같은 균에 감염됐을 때 생존율이 80%에서 10%까지 극명하게 갈렸고, 그 핵심 원인은 무리바큘라세아(Muribaculaceae) 세균 그룹 중 ‘상게리박터 무리스(Sangeribacter muris KT1-3)’ 균주가 분비하는 작은 물질이었다. 패혈증의 치사 위험이 병원균 독성뿐 아니라 환자가 평소 가진 장내 미생물 환경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로, 중환자실 입원 환자 등 패혈증 고위험군을 사전에 선별하는 새로운 감염 예측·예방 전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제시됐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4월 30일 게재됐다.
같은 균 감염에도 생존율 80% vs 10%…장내 ‘무리바큘라세아’가 패혈증 치사율 갈랐다
패혈증은 세균 감염 자체보다, 그 세균과 싸우는 면역 반응이 통제 불능 상태로 폭주해 환자 자신의 장기를 손상시키는 ‘면역 과열’ 현상이 더 치명적이다. 똑같은 균에 감염돼도 같은 정도로 위중해지지 않는 이유 역시, 환자마다 면역 반응 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학계는 이 차이를 일으키는 결정적 변수가 무엇인지 명확히 짚어내지 못했다.
생명연·충북대 공동 연구팀이 주목한 것은 장 속에 사는 미생물이다. 연구팀은 유전적으로 동일한 실험쥐라도 공급 업체에 따라 패혈증 감수성이 뚜렷이 달라지는 현상에 착안해, 이들의 장내 미생물 구성을 비교했다. 같은 양의 병원균(중환자실에서 사망률이 매우 높은 다제내성균 ‘아시네토박터 바우마니’)을 주입했을 때, 어떤 실험쥐 그룹은 대부분 살아남았지만 다른 그룹은 생존율이 10% 수준까지 떨어졌다.
생사를 가른 핵심 원인은 ‘무리바큘라세아(Muribaculaceae)’ 장내 세균 그룹이었다. 특히 이 그룹 안에서 새로 분리·동정한 ‘상게리박터 무리스(Sangeribacter muris KT1-3)’ 균주가 결정적이었다. 이 세균은 병원균 자체를 키우는 게 아니라, 평소에 면역 세포를 미리 자극해두는 방식으로 감염 시 치명적인 결과를 유도하고 있었다.
범인의 무기는 작은 분비물…면역 세포 미리 ‘전투 준비’시켜 사이토카인 폭풍 유발
그렇다면 이 장내 세균이 어떻게 면역 세포를 ‘미리’ 자극할까. 핵심은 세균이 뿜어내는 작은 분비물에 있었다. 연구팀은 세균이 살아가며 밖으로 내놓는 분비물(저분자 대사산물, 3킬로달톤(kDa) 이하의 아주 작은 물질)을 면역 세포에 직접 처리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면역 세포에서 염증 신호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작은 분비물의 표적이 된 면역 세포는 외부에서 들어온 세균을 가장 먼저 잡아먹는 ‘대식세포’였다. 대식세포는 평상시 평온한 상태로 있다가 적이 침입하면 활성화되는데, 상게리박터 무리스의 분비물은 적이 오기도 전에 대식세포를 ‘전투 준비 태세(사전 활성화·프라이밍)’로 만들어 놓았다. 이 상태에서 실제 병원균이 침입하면 면역 세포가 작은 자극에도 폭발적으로 반응한다.
폭발의 통로가 된 감지 센서는 ‘톨유사수용체 4(Toll-like receptor 4, TLR4)’라는 면역 세포 표면 단백질이다. 외부에서 들어온 세균을 가장 먼저 알아채고 염증을 시작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일종의 알람으로, 이 센서가 너무 예민해지면 신호 물질(사이토카인)이 통제 불능 상태로 쏟아져 나오는 ‘사이토카인 폭풍’으로 이어진다. 결국 환자 자신의 몸을 망가뜨려 치명적 패혈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대변이식으로 검증한 ‘장내 미생물→패혈증’ 인과관계…감염 예측·맞춤 치료의 새 길
연구팀은 이 인과관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검증했다. 먼저 장내 미생물을 모두 비운 무균 쥐에 건강한 쥐와 위험한 쥐의 대변을 각각 이식해, 미생물 자체가 패혈증 감수성을 좌우하는지 확인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위험한 미생물을 이식받은 쥐는 패혈증 사망률이 급격히 높아졌고, 건강한 미생물을 받은 쥐는 생존율이 개선됐다.
더 나아가 연구팀은 위험한 미생물을 가진 쥐와 건강한 쥐를 같은 공간에서 살게 하는 ‘합사’ 실험도 진행했다. 일상적인 접촉만으로 무리바큘라세아 세균이 건강한 쥐에게도 옮겨갔고, 그 결과 건강했던 쥐의 패혈증 생존율도 함께 떨어졌다. 장내 미생물이 일상 접촉으로 전파되며 감염 취약성을 함께 옮긴다는 점이 입증된 것이다.
이 발견은 패혈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수 있다. 그동안 패혈증 연구가 감염 발생 이후 염증을 어떻게 억제할지에 집중했다면, 이번 결과는 ‘환자가 평소에 가진 장내 미생물 환경’이 이미 패혈증 위험을 결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환자실 입원 환자 등 고위험군의 장내 미생물을 미리 분석해 패혈증 위험을 예측하는 바이오마커로 활용할 수 있고, 항생제 내성균 감염처럼 치료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내 미생물 기반 면역 조절이라는 새로운 대응 전략이 열릴 가능성이 있다는 게 연구팀의 평가다.
연구책임자인 서휘원 박사는 “이번 연구는 장내 미생물이 우리 몸의 면역 반응 강도를 조절해 감염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라며 “향후 장내 미생물 기반의 감염 예측 및 면역 조절 기술 개발로 이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