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각장애인의 ‘이미지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촉각 그래픽 기술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봉쇄령이 내려진 가운데 필자는 남편과 뉴욕 브루클린에 집을 구해 인테리어를 새로 꾸미기로 했다. 필자는 개방형 주방부터 욕실 자재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배치할지 남편과 함께 의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대화 속 애매모호하고 부정확한 표현들 때문에 작업이 더뎌지고, 서로 짜증을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남편은 필자에게 몇 가지 주요 건축 기호들을(예를 들어 문이 어느 방향으로 열리는지 표시하는 기호) 가르쳐준 다음 평면도를 인쇄했다. 곧 필자와 남편은 각자 자기 생각대로 도면을 그리고 공유하기를 반복하면서 마침내 구상한 디자인을 향해 나아갔다.
이것은 그저 평범한 이야기다. 필자가 시각장애인이라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빼면 말이다. 필자는 필자를 포함한 뉴욕의 시각장애인들이 이미지를 만들고 탐구하는 일에 사명을 다하고 있다. 필자가 집 평면도와 도면을 만드는 데 사용한 장비인 첨단 그래픽 엠보서(graphics embosser)와 간단한 촉각 ‘칠판’은 뉴욕 공공도서관의 앤드루 하이스켈 점자 및 음성도서 도서관(Andrew Heiskell Braille and Talking Book Library)에 있는 디멘션랩(Dimensions Lab)에 마련돼 있다. 여기서는 시각장애인, 비장애인 모두가 시각장애인들이 촉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촉각 그래픽(tactile graphic)과 3D 모델을 만드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필자는 앤드루 하이스켈 점자음성도서관의 보조공학(assistive technology) 코디네이터로서 이용객들이 장애인 보조기술(accessible technology)을 사용해 일자리 찾기, 컴퓨터 비전을 이용한 종이 우편물 읽기, 길 찾기 앱을 사용해 독립적으로 여행하기 등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뉴욕 공공도서관 디멘션랩에서 시각장애인 이용객들이 다양한 촉각 그래픽 작업을 하고 있다.
필자와 같은 보조기술 전문가들은 대부분 이미지를 다루는 일을 하지 않지만, 필자는 이것이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약도 읽기, 문신 도안 살펴보기, 좌석 배치도 만들기 등 이미지와 관련된 여러 일들이 비장애인에게 그렇듯 언젠가 시각장애인에게도 부담 없는 일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픽이나 이미지에 대해 논할 때는 이를 ‘시각적으로 경험한다’는 전제가 이미 내포되어 있다. 시각 예술, 시각 보조도구(visual aid), 데이터 시각화 같은 것들을 언급할 때 사람들은 이미지의 세계를 시각이라는 지각적 수단과 결합하게 된다. 이처럼 시각에 치우친 문화는 시각을 이해의 통로로 삼아 시각을 위한, 그리고 시각에 의존한 공간적 표상을 중심에 두고 확장해 나간다.
시각장애인들의 콘텐츠 접근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면, 점자의 개발과 발전, 화면 콘텐츠의 텍스트 음성 변환(TTS) 및 점자 출력 이용 가능성, 그리고 화면 읽기 소프트웨어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는 보조기술 적용 웹사이트와 앱의 필요성 등 몇 가지 키워드가 떠오를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저시력자를 포함한 시각장애인들의 정보 활용 능력에 있어 주춧돌 역할을 하지만, 이는 주로 ‘텍스트’라는 특정 유형의 정보에 제한된다.
강의,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 뉴스, 엔터테인먼트 등 거의 모든 콘텐츠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풍부한 시각 자료와 함께 제공되는 시대에, 시각장애인들은 보통 텍스트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린다. 이 같은 상황에서 콘텐츠 제작자들은 이미지 속 정보를 텍스트로 제공하는 ‘대체 텍스트’를 이용해 시각 콘텐츠의 주요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백문불여일견’이라는 옛말처럼 세상에는 문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주식 차트, 전기 회로도, 지도와 같은 콘텐츠의 경우 이를 제작자의 의도대로, 즉 이미지 그 자체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콘텐츠는 텍스트 설명 안에 모든 정보를 담으려 하면 지나치게 장황해질 뿐 아니라 이미지가 뜻하는 적절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미지를 사용하는 이유, 즉 공간적 표상을 통해 정확하고 간결하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이미지의 힘은 본질적으로 시각적이지 않다. 촉감으로 이미지를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촉각 그래픽은 시각장애인 독자, 학습자, 크리에이터들을 공간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로 안내한다.
촉각 그래픽
필자는 시각장애인 기술(blind tech) 교육자로서, 시각장애인 도서관 이용객들의 일상생활을 좀 더 자율적이고 원활하게 만들어 줄 도구들을 열정을 가지고 소개하고 있다. 필자가 속한 팀은 시각장애인 직원과 자원봉사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누구나 기존에 존재하는 그래픽을 인쇄하거나 자신만의 그래픽을 창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그룹 워크숍을 운영하고 개인 이용 예약을 받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일대 도시철도) 지도와 같은 묘사도의 세부 사항을 확대해 보며 느낄 수 있는 편리성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LIGHTHOUSE FOR THE BLIND AND VISUALLY IMPAIRED
2016년 뉴욕에 온 지 얼마 안 된 한 시각장애인 이용객이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뉴욕 내 5개 자치구의 모양, 상대적 위치, 크기가 표시된 지도가 필요하다는 간단한 요청을 해왔다. 필자는 지도를 제작하는 점자 교과서 출판사를 몇 군데 소개해 주면서 답했지만, 곧 스스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시각장애인이 세상에 없던 새로운 촉각 그래픽을 원할 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어느 때보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촉각 그래픽을 많이 접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시력자를 포함한 시각장애인들이 특정 이미지에 호기심을 느꼈을 때 그 이미지의 촉각 그래픽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촉각 그래픽 디자인은 변환(transformation)의 예술이다. 눈으로 보기에 매력적이었던 이미지도 손끝에서는 어수선하고 조잡할 수 있다. 촉각 그래픽의 가독성과 효과는 제작자가 촉감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촉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해상도는 시각으로 인식하는 해상도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촉각 그래픽은 주요 요소들을 손끝으로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확대해야 한다. 또한 촉각 디자인에 색상은 포함되지 않으므로 대상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색상이 아닌 다른 수단을 써야 한다. 예를 들어 촉각 원형 차트의 경우 네 가지 항목을 구분하기 위해 네 가지 다른 질감(‘흰색’을 표현하기 위한 무질감, 점, 사각형, 줄무늬로 채워진 질감 등)을 사용할 수 있다. 또 코로나19 방역 조치 여부에 따라 확산 추세가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키가 큰 종과 납작한 종 모양의 두 곡선을 겹쳐 놓은 그래프(‘flatten the curve’ graphic) 역시 색상 대신 점선과 실선 등으로 표시하면 그래픽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약도 읽기, 문신 도안 살펴보기, 좌석 배치도 만들기 등 이미지와 관련된 여러 일이 비장애인처럼 시각장애인에게도 부담 없는 일상이 되기를 바란다.
고화질의 촉각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은 일반적으로 교과서 출판사, 대학 내 장애인 지원 사무실, 학내 행정실 등의 기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촉각 그래픽은 일반적으로 기관에서 필요로 하는 우선순위에 맞게 제작되며, 대부분 시각장애인들이 디자인, 제작 및 배포를 담당한다. 필자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촉각 그래픽 랩을 운영한다면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함을 깨달았다. 첫 번째, 촉각 그래픽 장비에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 두 번째, 비시각적 수단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집중적으로 마련할 것. 세 번째, 이용자가 이전에 어떤 경험을 했든 촉각 그래픽 작업 실력을 쌓고, 자신감을 얻을 수 있도록 할 것. 필자는 이 조건들을 염두에 두고 뉴욕 공공도서관에서 ‘직원을 위한 혁신 프로젝트’ 지원금을 받아 디멘션랩(Dimensions Lab)을 설립했다.
일단 디멘션랩을 방문하면 맨 처음에는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다양한 공정을 거쳐 미리 제작된 샘플 포트폴리오를 살펴보게 된다. 이를테면 ‘그래픽 엠보싱’이란 종이나 카드지에 인치당 최대 100개의 점자를 8가지 높이로 빠르게 펀칭하는 기술이다. 이 과정에는 큰 소음이 난다. ‘스웰폼(Swell Form)’은 특수제작한 마이크로캡슐 용지를 가열된 기계에 넣어 용지 내 알코올과 잉크 내 탄소 사이의 화학반응을 통해 선이 돌출되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또한 예전 방식이지만 필자가 가장 선호하는 ‘써모폼(thermoform)’이라는 기술이 있다. 점자책 전사자가 그래픽은 물론 번역과 수정에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기 전인 1960년대, 처음으로 개발된 써모폼 기계는 원본이 되는 자료 위에 특수제작한 얇은 플라스틱지를 얹은 다음 피자를 굽는 오븐처럼 뜨거운 열을 가해 사본을 각인했다. 점자 인쇄물, 금속 시트에 양각으로 새긴 일러스트레이션, 혹은 철사나 사포, 폼 같은 재료로 만든 촉각 릴리프상(relief image)이 원본이 되었다.

디멘션랩의 그래픽 엠보서는 카드지에 다양한 높이의 점자를 빠르게 새길 수 있다.

BETH PERKINS / BETH PERKINS
디멘션랩에서는 촉각 그래픽 제작을 염두에 두고 특별히 설계된 장비뿐만 아니라 기타 촉각 미디어 제작에 활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하드웨어를 제공한다. 대부분의 촉각 그래픽 제작 방식은 1밀리미터 미만의 선과 도형을 사용해 일종의 ‘2.5 차원’적인 표현을 하지만, 3D 프린팅을 사용하면 전체 모델을 제작할 수 있다. 그러나 3D 프린팅이 모든 면에 있어 적합한 것은 아니다. 플라스틱 필라멘트를 가열된 노즐 안에 밀어 넣어 층별로 증착해 원하는 모양을 구축하는 방식은 상대적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도면, 차트, 그래프를 표현하는 데에는 3D가 아닌 다른 접근 방식이 더 적합하다. 반면 원본 사물이 3차원이면서 분자처럼 너무 작거나, 코끼리처럼 너무 크거나, 혹은 너무 섬세해서 만질 수 없는 경우에는 이를 본떠서 만든 3D 모델이 적합할 수 있다.
뉴욕 공공도서관의 원고∙아카이브∙희귀 도서 부서(Manuscripts, Archives, and Rare Books Division)에는 기원전 2500년경 일련의 점토 설형 문자판을 포함한 여러 가지 매우 섬세한 유물들이 풍부하게 보관되어 있다. 디멘션랩 설립 직후, 우리 팀은 계획 검증 차원에서 뉴욕 공공도서관의 디지털 팀과 협력해 고고학자들이 사진을 3D 모델로 변환하는 데 사용하는 기술인 사진 측량법(photogrammetry)을 통해 일부 유물 정보를 캡처했다. 필자는 과거 교과서에서 설형문자에 대해 읽었고, 이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또 종이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벽돌처럼 무거운 점토판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고 다니던 모습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우리 팀에서 만든 3D 모델은 설형문자의 실체에 대해 교과서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손바닥 크기의 둥근 원통 혹은 직사각형 모양인 점토판의 표면에는 문자들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문자들은 공식 서기관이나 다른 어떤 사람들이 눈이 멀어서, 아니면 촛불 없이 너무 어두워서 손으로 더듬으며 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깊게 새겨져 있었다. 현재 이 3D 모델은 여러 도서관과 학교를 오가며 교구로 활용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3D 프린트의 진행 상황을 소리로 파악한다. 가령 필라멘트가 잘못 배치되어서 긁히거나 부딪히고 끌리는 소리를 듣는다. 또 이들은 필라멘트가 튜브에 들어갈 때 부드럽게 만져 보면서 재료가 잘 흐르고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학습한다. 뜨거워진 기계를 모니터링하고 유지 및 보수하기 위해 안전하고 요령 있게 만지거나, 와이어 절단기와 핀셋을 사용해 막힌 필라멘트를 제거하고 다시 끼우는 등, 눈을 감고 하기에 두려울 법한 작업도 배워서 익히면 비시각적인 방식으로 쉽게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는 또 다른 문제다. 최근까지도 촉각적인 표현을 위해 표면에 요철을 만들어 내는 다이내믹 스크린(dynamic screen) 기기에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잘 없었다. (이와 유사한 디지털 점자 디스플레이는 핀을 이용해 한 번에 한 줄의 점자를 띄우지만, 이미지를 표현하기에는 해상도나 공간이 부족하다.) 촉각 그래픽은 촉감으로 읽을 수 있도록 프린트되어야 한다. 생활 속에서 마주친 모든 이미지를 프린터로 보내 약 1분을 기다려 볼 수 있게 된다고 상상해 보자. 오늘날 촉각 독자들은 큰 그림을 세세한 부분까지 확대해 볼 때의 편리함과 재미를 누리기 어렵다. 디지털 지도를 사용할 때 ‘현재 내 위치’를 표시한 핀 주변의 길을 탐색하며 안정감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아직 촉각 그래픽에 부족한 것이 무엇이며 그게 왜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픽 작업을 하는 시각장애인들은 모든 이미지들을 일일이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원본 이미지를 변환하지 않고도 가독성과 촉각적 만족감 두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촉각 이미지가 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얼핏 그대로 괜찮아 보이는 이미지도 크기를 확대하기 전에 잘라낼 여백이 존재하거나, 밝은 회색 배경이 자칫 수많은 점들로 번역되어 산만해지는 경우가 있다. 결국 관심 있는 사진이 많을수록 이들을 인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촉각 그래픽 교육 및 접근성 향상을 위한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시각장애인인 민 탐 하(Minh Tam Ha)는 친구와 가족들이 코로나19 봉쇄령이 내려진 동안 색칠놀이를 통해 위로와 안정을 찾는 것을 보고, 촉각 독자에게 적합한 색칠놀이들을 온라인으로 큐레이션하여 엠보싱 처리한 후 필요에 따라 우편으로 보내기로 했다. 민은 이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번역이 잘 될 만한 선명하고 또렷한 이미지를 찾기 위해서는 하나하나 손으로 직접 작업해 봐야 했다. 시각적으로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더 빨리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꽃과 잎사귀가 화분에 심어진 단순한 이미지라 해도 선이 너무 굵거나 선끼리 서로 너무 가까워 명확히 구분되지 않으면, 이미지를 촉각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AMERICAN PRINTING HOUSE
그럼에도 많은 학생과 성인의 손끝에 디지털 촉각 그래픽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 중에 있다. 10줄 32셀 크기의 선명한 점자 디스플레이를 갖춘 탁상용 기기인 모나크(Monarch)는 2023년 가을부터 현장시험에 돌입할 예정이다. 이 프로젝트는 교육 부문에서 비시각, 점자 및 촉각 문맹 퇴치를 위해 힘쓰고 있는 비영리 단체인 ‘시각장애인을 위한 미국 출판사(American Printing House for the Blind)’, 디지털 점자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탄탄한 실적을 보유한 보조기술 회사 휴먼웨어(Humanware), 미국 시각장애인의 공정성과 포용성을 개선하기 위해 회원들의 전문성을 활용하는 시민권 및 옹호 단체인 미국 시각장애인 연합회(National Federation of the Blind)의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2023년 초 필자는 모나크를 시험해 보면서 미국 지도를 확대해 개별 지역을 살펴볼 수 있었고, 또 콘퍼런스 센터의 세부 평면도를 이동하며 1분 만에 12개의 이미지를 촉각으로 빠르게 훑어본 다음 그중에서 더 자세히 보고 싶은 이미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점자 인쇄물 형태의 미디어 제작 방식과 비교할 때, 모나크는 단색으로 된 저해상도의 결과물을 출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현재 모나크는 점자를 한 가지 높이밖에 지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잠시도 기다리지 않고 주어진 이미지를 자세히 탐색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새롭고 놀라운 기능을 지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중에 출시되고 있는 또 다른 촉각 태블릿에는 오르빗 리서치(Orbit Research)에서 나온 그라피티(Graphiti)가 있다. 모나크와 마찬가지로 그라피티는 핀 배열을 활용해 저해상도 그래픽을 렌더링한다. 그라피티는 정전식 터치패드로 화면에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점자의 높이를 다양하게 해 회색조와 유사한 음영감을 줄 수 있다. 운 좋게도 디멘션랩에 초기 시험 기기가 있는 덕분에, 이용객들은 엠보싱을 시작하기 전 이미지를 미리 보거나 직접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데 기기를 사용할 수 있다.
한편 인터페이스 디자인이 질적으로 떨어지는 점은 여전히 극복해야 할 부분이다. 잉크스케이프(Inkscape),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Adobe Illustrator) 등 널리 쓰이는 컴퓨터 디자인 프로그램들조차 화면 낭독 프로그램이 메뉴와 대화 상자의 내용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정립된 개발 지침을 준수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은 이미지 크기 조정, 회전, 윤곽선 그리기 등의 단순한 작업들을 할 수 없다. 시각장애인인 학생 및 성인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한 프로그램이 개발되지 않는다면 많은 경우 이들은 디지털 디자인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극복하고자 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여러 창의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들은 앞을 볼 수 있는 동료들과 협업하거나, 선이나 도형을 이용해 수동으로 코딩(hand coding)하고, 촉각 도구를 사용해 직접 초안을 그린다. 또 보조 메뉴 시스템을 사용해 개체 생성 및 이동, 레이블 통합을 할 수 있는 독점 소프트웨어(예를 들면 싱커블(Thinkable)의 택타일뷰(TactileView))를 사용해 자기만의 해결방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무엇이 가능한지 배우기
필자가 촉각 그래픽에 관해 익힌 지식과 노하우에는 공식적인 교육을 통해 배운 것이 거의 없다. 대신 주변에 물어보거나 직접 부딪치며 해결책을 찾은 시각장애인 및 비장애인들이 인터넷에 공유한 지식으로부터 상당 부분을 배웠다. 시각장애인으로서 그래픽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장비와 커뮤니티 접근성 둘 모두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멘토링, 주변의 지원, 보조기술 도구, 기술을 연마할 기회, 그리고 가능성에 대한 작은 실마리가 필요하다.
디멘션랩을 설립하고 나서 첫 몇 달은 필자의 예상과 달리 한산했다. 필자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그래픽을 제작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찾아올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이용객들에게 디멘션랩에 대해 말했을 때 몇몇이 필자에게 물었다. ‘왜 그래픽이 필요한가?’
일반적으로 시각장애인들은 텍스트 위주의 생활에 너무 익숙해 어디서부터 촉각 이미지를 사용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심지어 자신이 무언가 놓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수 있다. 최근 필자는 여러 이용객에게 이미지가 중요한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촉각 그래픽을 마련해 두고 있다. 필자의 한 동료는 시각장애인이 자기 서명을 개발할 때 참고할 만한 커다랗고 아름다운 알파벳 필기체 손 글씨를 기부했다. 시각장애인 디자이너이자 촉각 지도 제작자인 조시 밀레(Josh Miele)가 발명하고,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시청각 장애인 복지기관인 라이트하우스(LightHouse for the Blind and Visually Impaired)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티맵(TMAP)이라고 불리는 한 웹 앱은 요청 시 어떤 주소든 촉각 거리 지도를 만들어 준다. 또한 민 하가 제작한 색칠놀이에는 하네스를 착용한 안내견, 꽃다발, 복잡한 만다라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점자가 표시된 크레용과 잘 어울려 모든 연령대가 쉽고 즐겁게 이미지를 접할 수 있다. 이용객들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촉각 그래픽을 접하고 나서 그들이 또 무엇을 탐색하고 싶은지 상상력을 넓힐 수 있다.
필자가 언어로만 그려왔던 새집의 평면도를 손끝으로 처음 느낀 순간을 떠올려 보면, 답답함과 혼란에서 일순간 해방된 듯한 느낌이 들면서 많은 것에 대한 이해가 밀려왔던 기억이 난다. 필자는 그 정확성과 편리함에 매혹되었다. 촉각 그래픽은 미래의 집을 상상하고 그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이상적인 도구였다. 필자는 기술 교육자로서 누군가가 기술에 대한 행복감을 품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어떤 이용객들은 휴대전화에서 장애인용 나침반을 사용할 때, 처음으로 책을 다운로드 했을 때, 좋아하는 프로그램의 오디오 설명을 켰을 때 이러한 경험을 한다. 이용객들은 기술에 대한 도움을 얻기 위해 필자를 찾아오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과 이를 향상시킬 도구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발걸음을 옮긴다. 촉각 그래픽은 시각장애인이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공간적 학습 및 창작에 대한 힘과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LIGHTHOUSE FOR THE BLIND AND VISUALLY IMPAIRED
촉각 그래픽 제작의 기술적 한계도 중요한 이슈지만, 이 기술에 대한 접근성이나 인식 부족 문제는 더 심각하다. 그래픽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래픽의 필요성을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들이 요구하지 않으면 그래픽을 대부분 제공받지 못한다. 필자는 시각장애인 및 협력자들과 함께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 더욱 노력해 나가고 있다.
2023년 3월 뉴욕 공공도서관의 커뮤니티실에서 첫 번째 촉각 예술 수업이 사흘에 걸쳐 열렸다. 참가자들은 일반적인 종이에 볼펜으로 촉각 선을 그리는 ‘센세이셔널 블랙보드(Sensational BlackBoard)’라는 단순한 제품을 이용해 손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다. 또 참가자들은 소리와 리본 끈을 이용해 원근법에 대해 배웠다. 이들은 지도를 탐색하고 코드를 작성해 디지털 드로잉을 만들기도 했다. 우리는 함께 비시각적인 접근법으로 이미지를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기대를 품고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혹은 시력을 잃은 후 처음으로 이미지를 접하기는 어렵고 취약한 일일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이해하고 공감했다. 우리는 대부분이 ‘이미지 빈곤’에 익숙하다는 냉혹한 현실을 직시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촉각적 이미지를 접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에게 이를 요구할 자격이 있고, 이를 통해 더욱 융성해질 거라고 확신했다. 우리는 커뮤니티의 이미지 빈곤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미지를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이미지 문해력(image literacy)는 매우 중요하다. 시각장애 아기의 첫 그림책부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지도, 차트, 그래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이미지 문해력과 관련된다. 이미지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명제 아래 행동한다면 우리는 앞으로 그러한 현실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이 글을 쓴 챈시 플릿(Chancey Fleet)은 뉴욕 공공도서관의 보조공학 코디네이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