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락하고도 섬뜩한 VR 수면실의 세계
차분한 로파이(Lo-Fi) 음악이 아득히 들려오고 별똥별이 머리 위 반짝이는 은하수를 가로지른다. 누워 있는 채로 몸이 물리법칙을 거슬러 우주를 두둥실 유영한다. 긴장을 풀고 하품하며 몸을 쭉 뻗는 순간 꽉 쥔 주먹이 잠시 존재를 잊고 있던 베개를 푹 찌른다.
물론 이곳은 우주가 아니다. 내 육체는 집 안 소파에 누워있지만, 정신은 가상현실 플랫폼 VR챗(VRChat)의 수많은 ‘수면실’ 중 한 곳에 있었다. 이 가상 공간에서 사람들은 헤드셋을 끼고 편안하게 쉬며 잠을 청하기까지 한다. 불면증과 고독에 시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이 VR 수면실은 처음 방문한 사람에게도 안전하게 휴식을 취하거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 되어주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말이다.
각각의 VR 수면실은 사용자들이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어떤 수면실은 모닥불이 있는 해변과 캠핑장을 모방하였고 호텔 객실이나 오두막을 재현한 방도 있다. 배경음악은 편안한 리듬 곡부터 자연의 소리, 완전한 적막까지 다양하며, 조명 또한 네온 디스코볼, 칠흑 같은 어둠 등의 여러 종류가 있다. 원하면 다른 사용자들과 모여서 잠을 잘 수도 있는데 이것은 외로움을 덜고 싶은 사람들에게 특히 매력적이다.
약 1년 전부터 소셜 수면(social sleeping)을 해온 미디아 가르시아(Mydia Garcia)가 바로 그런 경우다. 가르시아는 “새벽 3시까지 VR로 춤을 추고 나면 피곤하긴 하지만 VR 세계를 떠나거나 친구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가르시아와 친구들은 외딴 세계를 다니며 바짝 붙어 잠들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치유 받는 느낌과 유대감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제프 슈워드(Jeff Schwerd)는 팬데믹 기간에 수면실을 알게 되어 외로움을 해갈했다. 그는 낯선 사람과 껴안는 것을 좋아해 종종 전신 트래킹(tracking) 기능을 사용해서 안고 안기는 느낌을 느낀다. 전신 트래킹을 하면 아바타가 사용자의 실제 신체와 동기화하여 움직일 수 있다. 슈워드는 이렇게 하면 보호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잠이 더 잘 온다고 말한다. 그는 수면실의 분위기도 편안하다고 한다.
슈워드는 “혼자 쉬기에 가장 좋은 곳은 모닥불이 있는 잔디 언덕이다. 모닥불 타는 소리가 듣기 좋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VR 수면실을 찾는 이유가 오로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기 때문만은 아니다. 스콧 데이비스(Scott Davis)는 불면증을 극복하기 위해 일주일에도 몇 번씩 VR챗 수면실을 이용한다. 그는 “VR에서 잠들기가 훨씬 쉽고 더 안정적으로 잠에 들 수 있다“라고 말한다. 또 그는 “보통 VR 밖에서는 매우 지쳐야만 잠이 온다. 하지만 VR에서는 피곤하지 않았던 날에도 바로 누워 금방 잠에 빠질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것이 데이비스가 계속 수면실에 가는 이유다. 그는 “불면증 환자인 내가 잠을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라고 말한다.
비영리 연구소 SRI 인터내셔널(SRI International)에서 수면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 마시밀리아노 드 잠보티(Massimiliano de Zambotti)는 VR이 불면증 환자에게 치료 효과를 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이러한 통제감 덕분이라고 말한다.
드 잠보티는 “불면증에 걸린 사람은 잠자리에 드는 순간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걱정과 기억을 되새기는가 하면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이렇게 긴장이 풀리지 않고 각성이 높은 상태에서는 잠에 들기가 쉽지 않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신경과학적으로 VR은 스스로 수면 환경을 조절할 수 있어 효과적이지만, 현실과 연결되어 있기에 잠에 들 만큼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만약 VR에서 이처럼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안전한 느낌은 휴식과 수면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집에서 혼자 누워있을 때도 그렇다.
어느 날 필자가 VR 수면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들어서자마자 한 아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로봇 모양 아바타였던 그 아이는 필자와 어떤 중세 기사 아바타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참고로 필자의 아바타는 작은 모자를 쓴 버터 조각이었다) 몹시 화가 난 로봇은 한쪽 구석에 아바타 예닐곱 명이 모여 누워 평화롭게 잠들어 있던 곳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아이 목소리로 이들을 조롱했다. “죽여버릴 테다. 말 그대로 죽여버릴 것이다“
메타버스에 미성년 사용자가 많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수면실을 돌아다녀 보니 성인 공간에 아이들이 곤혹스러울 정도로 자주 출몰하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가 갔던 또 다른 수면실은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로 떠드는 어린 목소리들이 가득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에 올라갔을 때는 푹신한 벨벳 소파에 빨간 조명이 켜진 곳이 나왔다. 그런데 뒤쪽에서 한 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당신 아비(아바타)가 마음에 들어.“ 고개를 돌려보니 한 로봇 아바타와 허수아비처럼 생긴 아바타가 대화하고 있었다. 남자 목소리가 답했다. “나도 네 아바타가 좋아. 안아 볼래?” 아이 목소리로 말하던 아바타는 공중으로 떠올랐고, 필자는 불안한 마음에 그 뒤를 따랐다.
슈워드도 VR 수면실에서 아이들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서 미성년자가 골칫거리인 것은 분명하다“라고 말하면서도 대부분의 수면실은 조용하고 ’정중한‘ 분위기였다고 주장했다.
여러 VR 수면실을 돌아다녀 본 결과 그의 말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우연히 입장했던 몇몇 수면실들은 텅 비어 있었고 조용했다. 다른 수면실에서는 아바타들이 서로의 품에 파고들며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또 어떤 수면실에서는 잠에 들지 않은 아바타들이 무리를 이루어 조용한 분위기에서 속삭이거나 휴식을 취했다. 필자는 아바타들로 가득 찬 방에서 그저 떠다니는 버터 조각 아바타에 귀 기울이거나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잊은 채 ‘실례합니다‘라고 웅얼거리며 살금살금 다녀야 할 때가 많았다.
필자는 VR에서 잠들 수 없었다. 일단 주변 환경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얼굴에 착용한 헤드셋이 불편했다. 또 수면에 방해가 되는 방도 있었지만, 그래도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그저 앉아서 쉴 만한 수면실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는 조용히 쉴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쉽지 않지만, 가상 수면실에서는 누워서 별을 볼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