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 프레젠테이션의 ‘짧은’ 역사…슬라이드 쇼에서 스티브 잡스의 키노트까지
1948년 10년 넘게 유지되던 금주령이 마침내 해제되면서 술은 다시 소비자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주류회사 시그램(Seagram)은 미국 전역의 주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연례 영업 회의를 11개 도시를 순회하는 행사 형태로 기획했다. 시그램은 행사를 위해선 돈을 아끼지 않았다. 전문 배우들을 출연시켜 위스키를 파는 세일즈맨의 삶을 다룬 2시간짜리 연극을 공연했고, 관람객을 위한 아름다운 대기실도 마련해 무료 음료를 제공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행사의 압권은 슬라이드 쇼였다.
시그램이 준비한 프레젠이션인 일명 ‘시그램-비타라마(Sigram-Vitarama)’는 슬라이드 쇼 그 이상이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가로 12.2m, 세로 4.6m 크기의 5개 스크린에 투사된 수백 장의 이미지는 관람객들에게 증류 과정에 대한 생동감 넘치는 경험을 선사했다. 행사에 참석했던 한 관람객은 “시그램이 보여준 화면은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정적이지 않았다”며 “전체적으로 매우 웅장한 느낌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이스트먼 코닥(Eastman Kodak)이 1939년 세계박람회에 선보인 전시회에서 영감을 받은 시그램-비타라마는 영업 회의에 사용된 최초의 시청각 프리젠테이션이었다. 그리고 이 행사를 계기로 수많은 시청각 프레젠테이션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4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멀티미디어는 낯선 기술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 초 무렵이 되자 전국 광고를 하는 모든 회사에서 영업 교육과 판촉, 홍보, 내부 소통 활동의 일환으로 멀티미디어 장비(16mm 프로젝터, 슬라이드 프로젝터, 필름 스트립 프로젝터 및 오버헤드)를 사용하게 되었다. 많은 기업들이 사내 시청각 감독을 고용했다. 이런 감독들은 기술자라기보다는 쇼 담당자에 가까웠다. 프레젠테이션은 보통 지루하다고 여겨지기 마련이나 사실 제대로만 준비하면 연극처럼 관중의 몰입을 유도할 수도 있다. 비즈니스 세계는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시그램-비타라마 등장 이후로 현재까지 기업들은 이미지가 지닌 극적인 효과를 활용해 세상에 아이디어를 홍보해 왔다.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가겠습니다
슬라이드를 넘길 때 들리는 ‘딸깍’ 소리는 매우 거슬린다. 하지만 1987년 최대 규모의 슬라이드 쇼가 펼쳐지고 있는 이 곳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샴페인이 흐르고, 사운드 시스템이 더 큰 소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객석을 채운 2,500명의 귀빈들은 호화로운 여행을 주제로 한 1시간짜리 짧은 오페라를 관람하고 있다. 무대 위에는 대규모 합창단, 스톡홀름 필하모닉 단원 전원, 그리고 약 50명의 무용수와 공연자들이 사브 9000CD(Saab 9000CD) 세단 2대 주변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크롬으로 된 차량 세부 장식, 가죽 시트, 탁 트인 도로가 담긴 멋진 이미지가 그 편에 놓인 26피트(8미터) 높이의 화면에서 춤을 춘다. 여기 보이는 이미지는 모두 아날로그 기술의 산물이다. 약 7,000개의 필름 슬라이드는 격자 모양으로 놓인 80개의 코닥(Kodak) 프로젝터에 섬세하게 배치되어 있다.
파워포인트(PowerPoint)와 디지털 프로젝터가 발명되기 훨씬 이전에는 35밀리미터 필름 슬라이드가 가장 효과적인 프레젠테이션 수단이었다. 슬라이드는 16밀리미터 필름보다 더 크고 선명하며, 제작 비용이 저렴하고, 비디오보다 더욱 다양한 색채를 구현하며, 해상도도 뛰어났다. 슬라이드는 CEO와 최고 경영진이 주주, 직원 및 영업 사원들을 위한 연례 회의에서 가장 인상적인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일 수 있는 유일한 매체였다. 업계에서 ‘다중 이미지(multi-image)’ 쇼로 알려진 이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프로듀서, 사진작가, 라이브 프로덕션 스태프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전체 슬라이드 쇼의 내용을 기록하고 스토리보드를 작성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이미지를 선택하고 촬영된 사진을 배열한 후에는 애니메이션과 특수 효과가 더해졌다. 흰 장갑을 낀 기술자는 각각의 사진을 현상하고 배치하고 먼지를 털어낸 후 프로젝터에 연결된 원형 통인 캐러셀에 넣었다. 쇼를 제어하는 컴퓨터에 수천 개의 신호가 입력된 후에는 끊임없는 테스트가 진행되었다. 컴퓨터가 먹통이 되거나 프로젝터 전구의 불이 나가고 슬라이드 캐러셀이 막히는 등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상업 사진작가에서 슬라이드 제작자로 전향한 더글러스 메스니(Douglas Mesney)는 “이 작업에 많은 기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고 이질적인 조각들이 투입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쇼가 작동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설립한 인크레더블 슬라이드메이커(Incredible Slidemakers)는 사브 차량의 출시를 알리는 슬라이드 쇼를 제작했다. 이 쇼에는 프로젝터 80대가 투입되었다. 이제 77세인 그는 은퇴 기념으로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슬라이드 사업을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제작했다. 메스니는 1972년 뉴욕 보트쇼(New York Boat Show)에 설치된 6대의 스크린에서 영감을 받은 후 1970년대 초 다중 이미지 쇼 제작자로 직업을 바꿨다. 그는 펜트하우스와 자동차 잡지를 위한 광고 사진을 촬영했고 가끔 코닥 프로젝터 한두 대를 들고 광고주를 위한 소규모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프로젝터 6대를 가져와서 어떤 슬라이드 쇼를 제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면 모두가 ‘믿을 수 없어!’라는 반응을 보이곤 했다”고 회고한다.
“프로젝터 6대를 가져와서 어떤 슬라이드 쇼를 제작할 수 있는지 보여주면 모두가 ‘믿을 수 없어!’라는 반응을 보이곤 했다.”
더글러스 메스니, 상업 사진작가
여섯 대는 시작에 불과했다. 전성기에 메스니의 슬라이드 쇼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많은 장치 속에 최대 100대의 프로젝터를 고정해서 제작했다. 수많은 프로젝터들이 같은 화면을 가리키면 끊김없는 파노라마와 복잡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었고 모든 요소가 동기화되어 녹화됐다. 슬라이드 쇼에는 사고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상연된 메스니의 공연은 관중을 현혹시켰고 기업의 존재감을 드높였다. 이케아(IKEA), 사브(Saab), 코닥, 셸(Shell)과 같은 기업들이 메스니에게 작업을 의뢰했다. 그에게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수십만 달러의 제작 예산이 주어졌다. 다중 이미지 사업에서 이는 저렴한 편에 속했다. 카라비너 인터내셔널(Carabiner International)처럼 규모가 큰 시청각 커뮤니케이션 기업은 레이저 라이트 쇼, 대규모 댄서 군단뿐만 아니라 홀 앤 오츠(Hall & Oates), 올먼 브라더스(Allman Brothers), 머펫(Muppets)과 같은 최정상 음악 그룹까지 동원해 다중 이미지 ‘모듈’을 더욱 다채롭게 꾸몄고, 기업 회의용 쇼의 제작 비용으로 최대 100만 달러(한화 약 13억 4100만 원)를 청구했다. 카라비너에서 슬라이드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스크린 뒤에서 경력 대부분을 보낸 수전 버클랜드(Susan Bucklan)는 “내 직업이 락앤롤 그룹의 로드 매니저와 비슷했다고 믿고 싶지만, 실제로 나는 한 번도 투어 버스를 타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더글러스 메스니/인크레더블 슬라이드메이커

슬라이드 제작자들을 위한 다중이미지협회(Association for Multi-Image)의 회원 수는 단체가 설립된 1976년에는 한 명도 없었지만, 1980년대 중반이 되자 5,000명으로 증가했다. 황금기로 접어든 다중 이미지 사업은 약 2만 명을 고용했고, 여러 건의 축제와 4곳의 상업 잡지를 지원했다. 그 중 한 잡지에는 1980년 더글라스 메스니의 화려한 약력이 실렸다. 메스니에게 슬라이드의 전망에 대한 의견을 묻자, 그는 “우리는 1년 안에 부자가 될 수도 있고 시장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고 답했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당시에는 전자 슬라이드 프로그래밍 장치 제조사 30곳이 다중 이미지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펼쳤다. 슬라이드 쇼 기술은 인상적인 쇼를 원하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빠르게 발전했다. 구멍이 뚫린 종이 테이프와 오디오 카세트로 프로그래밍된 수동 슬라이드 전환 장치, 한 번에 30개의 프로젝터를 구동할 수 있는 AVL 이글 I(AVL Eagle I)과 같은 슬라이드 제어용 컴퓨터가 등장했다. 워드 프로세싱 및 회계용 소프트웨어와 함께 개발된 이글은 진정한 의미의 비즈니스 컴퓨터였다. 따라서 1980년대 초 모회사인 오디오 비주얼 랩(Audio Visual Labs)에서 분사했을 때, 이글은 실리콘밸리의 가장 유망한 컴퓨터 스타트업들 중 한 곳으로 부상했다. 이글은 1983년 여름 주식 시장에 상장됐다. 덕분에 이글의 회장이었던 데니스 R. 반하트(Dennis R. Barnhart)는 순식간에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러나 기업공개 후 몇 시간 만에 반하트는 붉은빛 최신 페라리를 몰고 가다 캘리포니아주 로스 가토스에 위치한 이글 본사 근처의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공중에서 뒤집힌 후 협곡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그의 결말은 슬라이드 사업이 곧 마주하게 될 운명과 닮아 있었다.
더글라스 메스니는 앞으로는 슬라이드 쇼를 볼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슬라이드 쇼를 상영할 수 있는 기계들이 폐기처분되었기 때문이다. 슬라이드 자체가 보관된 경우가 드물었다. 이따금 저장 장치에서 오래된 다중 이미지 ‘모듈’이 포함된 상자 몇 개가 발견되고, 그 중에 모듈이 손상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소수의 애호가와 은퇴한 프로그래머를 제외하고는 다중 이미지 슬라이드 쇼를 복원하고 연출할 수 있는 노하우가 있는 사람을 찾기는 매우 힘들다. 한 때 슬라이드 전문가로 일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절망감을 느낀다. 수전 버클랜드는 “모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우리는 모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는 무엇으로도 내 과거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과거를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아날로그와 최첨단 예술의 예상치 못한 교차점에 존재했던 슬라이드 쇼 산업은 20년이 조금 넘는 짧은 기간 동안 번성하다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포르노와 마찬가지로 프레젠테이션은 항상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켜왔다. 다중 이미지 시대에 메스니와 같은 제작자들은 더 크고 대담한 쇼를 만들기 위해 이용 가능한 모든 도구를 활용하여 슬라이드 쇼의 기술 수준을 최대한 발전시켰다. 메스니는 3분 동안 2,400장의 슬라이드로 된 쇼를 선보여 슬라이드 프레젠테이션 부문에서 최고 속도를 기록했다고 주장하지만, 이처럼 재생 속도가 가장 빠른 순간에도 슬라이드는 고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슬라이드를 제어했던 컴퓨터들은 쉴 새 없이 움직였고, 머지않아 슬라이드라는 매체를 넘어서는 수준으로 진화했다. 델라웨어에 있는 자신의 차고에서 오래된 다중 이미지 쇼를 복원하여 상영하는 전직 슬라이드 프로그래머 스티븐 미첼센(Steven Michelsen)은 “그 당시 컴퓨터는 슬라이드를 제어하기에는 충분히 빨랐지만, 실제로 이미지들을 직접 만들어 낼만큼 빠르지는 않았다”면 “컴퓨터에서 직접 쇼를 실행하고 볼만한 이미지를 만들려면 10년 또는 15년이라는 시간을 추가로 투자해야 했다”고 말했다.
2004년 제조된 프로젝터를 끝으로 슬라이드 프로젝터가 조립 라인에서 생산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공장 노동자들과 코닥의 황동 제품 담당자들이 프로젝터의 포장 내부에 서명한 후 장치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으로 넘겨졌다. 건배가 오가고 연설도 준비되어 있었지만 이미 파워포인트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적 배경에서 이는 사라질 기술에 대한 송별 행사와 다름없었다.
파워포인트의 발명
레지나 호텔(Hotel Regina)은 튀일리 정원(Tuileries Garden)과 루브르 박물관이 내려다 보이는 아르누보 양식의 빼어난 건축물이다. 1992년 어느 날 이 호텔의 낡은 회의실은 첨단 비디오 기술이 적용된 현대적 모습으로 환골탈태했다. 회의실 뒤편에 있는 작은 냉장고 크기의 컬러 프로젝터는 10만 달러(한화 약 1억 3410만 원)가 넘었고 작동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까지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 여러 명의 기술자로 구성된 팀은 파워포인트 3.0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섬세하게 설계하는 로버트 개스킨스(Robert Gaskins)가 회의실로 걸어 들어올 때까지 모든 문제의 발생 가능성을 완벽히 제거하기 위해 지난 48시간 동안 문제 해결에만 집중했다. 개스킨스는 겨드랑이 사이에 노트북을 끼고 나타나 낭독대 쪽으로 가서 비디오 케이블을 집어 들어 노트북에 꽂았다. 그리고 나서 수십 억 번이나 재생해 본 자신의 제작물을 처음으로 시연했다. 노트북에서 바로 재생되는 다양한 색상의 비디오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되자 유럽 각지에서 온 마이크로소프트 관계자들로 가득한 청중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청중들은 “우리들의 프레젠테이션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 즉시 알아차릴 수 있었다”고 회고했고 개스킨스는 훗날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박수갈채였다”고 밝혔다.


개스킨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 파워포인트 시대를 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큼 이제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려워졌다. 개스킨스는 타고난 프렌젠터(presenter)였다. 그의 아버지는 시청각 프로그램 회사를 운영했고, 그의 가족은 방학마다 가족 여행 일정에 이스트먼 코닥(Eastman Kodak) 공장을 포함하곤 했다. 버클리 대학원 시절 개스킨스는 기계 번역과 컴퓨터가 작성한 코딩된 하이쿠(일본 정형시의 일종)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영어, 언어학 및 컴퓨터 과학을 전공했고 3가지 박사과정을 마치기도 전에 실리콘밸리로 넘어가 막대한 수익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는 늘 인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맞는 다국어 능통자들로 팀을 구성했고 기술 관련 직무에 이례적으로 많은 여성들을 배치했다. 개스킨스는 당시 실리콘밸리에서 유일한 마이크로소프트 조직이었던 자신의 사무실에 보존 가치가 높은 예술 작품들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파워포인트의 설계자는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리처드 디벤콘(Richard Diebenkorn), 로버트 마더웰(Robert Motherwell)의 작품들 사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윗줄: 리처드 쉽스(RICHARD SHIPPS)/DD&B 스튜디오(DD&B STUDIO), 더글러스 메스니/인크레더블 슬라이드메이커, 윌든 엔터프라이즈(WILDEN ENTERPRISES)
가운데 줄: 더글러스 메스니/인크레더블 슬라이드메이커, 윌든 엔터프라이즈, 리처드 쉽스/DD&B 스튜디오
아랫줄: 윌든 엔터프라이즈, 리처드 쉽스/DD&B 스튜디오, 더글러스 메스니/인크레더블 슬라이드메이커
이미지 제공: 스티븐 미첼센
개스킨스가 1984년 써니베일에 위치한 스타트업 포어쏘트(Forothought)의 제품 개발 부문 부사장으로 재직할 때 작성한 파워포인트 제안서는 중요 항목들을 나열한 선언문이다. 이 제안서는 대부분이 놓치고 있는 35억 달러(약 4조 6900억 원) 규모의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 산업과 명확하고 효과적인 슬라이드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 제안서는 레이저 프린터, 컬러 그래픽, 코드나 명령어 없이 입력물과 동일한 출력물을 제공하는 ‘위지윅(WYSIWYG)’ 소프트웨어 등 최신 기술 동향을 나열하며 주목하는 떠오르는 신흥 시장인 데스크톱 프레젠테이션 시장에 주목한다. 이 문서에는 놀라운 수준의 혜안이 담겨있다. 개스킨스는 전체 내용에서 단 하나의 중요 항목만을 이탤릭체로 표시했다.
사용자의 이점:
콘텐츠 작성자가 프레젠테이션을 제어할 수 있다.
이는 개스킨스가 파악한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프레젠테이션의 제작을 외부업체에 의뢰하면 그 메시지가 자연스레 희석된다. 1980년대 초 개스킨스는 이 문제점을 날카롭게 간파했다. 그가 작성한 파워포인트 제안서의 최초 두 버전은 경영진이 비서나 슬라이드 담당 부서에 일을 맡기는 대신 스스로 오버헤드 투명 필름과 35mm 슬라이드를 직접 제작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작성되었다.
파워포인트는 지겨운 사무실 생활을 모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었다. 2001년 뉴요커(New Yorker) 프로필 섹션에서는 “당신이 다른 직원에게 사용을 강요하는 소프트웨어”라고 요약했다.
수십 년간 프레젠테이션 그래픽 업계를 선도했던 비즈니스 그래픽 회사인 제니그래픽스(Genigraphics)의 전(前) CEO 샌디 비트너(Sandy Beetner)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정보 흐름의 범위가 좁았다”고 설명한다. 그들의 고객은 주로 슬라이드에 총 천연색 차트, 3D 렌더링 및 기타 최첨단 이미지를 담을 수 있는 자원을 갖춘 포춘(Fortune) 500대 기업과 정부 기관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투명 필름과 떨리는 목소리로 정보를 전달해야 했다. 그녀는 “파워포인트가 발명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흑백으로 소통했고 이러한 환경에서 너무 많은 요소들이 누락되었다”고 평가한다.
비트너는 제니그래픽스의 전국 네트워크 서비스 부서들을 총괄했다. 이 부서는 미국의 모든 주요 도시에 위치했고 연중무휴로 바로 슬라이드를 제작하고 다듬고 인쇄할 수 있는 그래픽 아티스트를 고용했다. 프리젠테이션 문화에서 제니그래픽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커서 개스킨스가 제니그래픽스를 파워포인트 2.0의 공식 35밀리미터 슬라이드 제작 서비스 기업으로 지정하는 내용의 거래를 협상할 정도였다. ‘제니그래픽스로 전송(Send to Genigraphics)’ 메뉴 명령은 2003년까지 파워포인트에 포함되어 있었다. 우연히도 이 시기는 코닥이 캐러셀 프로젝터 제작을 중단한 시기와 거의 일치했다.
윌든 엔터프라이즈
개스킨스는 1993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은퇴하고 런던으로 이사했다. 그는 10년 후 오래된 아코디언의 전문가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파워포인트는 지겨운 사무실 생활을 모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었다. 2001년 뉴요커(New Yorker) 프로필 섹션에서는 “당신이 다른 직원에게 사용을 강요하는 소프트웨어”라고 요약했다. 데이터 시각화에 대한 명쾌한 논문으로 유명한 통계학자 에드워드 터프티(dward Tufte)는 2003년 컬럼비아 우주왕복선 사고의 원인이 파워포인트 탓이라고 비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터프티는 개스킨스의 소프트웨어가 순차적인 내용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계층적이며, 슬로건이 가득하고, 과도하게 관리되는 프레젠테이션을 만들어내며, “쓸모없는 차트”로 가득 차 있고, 진정한 의미는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터프티의 의견에 반색을 표했다.
로버트 개스킨스도 이러한 견해에 크게 공감했다. 무엇보다 터프티의 어머니이자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인 버지니아 터프티(Virginia Tufte)가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영어과 학부생 시절 개스킨스를 멘토링했기 때문이다. 파워포인트 도입 20주년 기념식에 작성한 회고록에서 개스킨스는 “비즈니스 및 학술적 논의의 설득력이 판매용 프레젠테이션에서 약화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인정했다. 그는 이 현상의 원인이 도구로서 너무 강력해서 기존의 모든 맥락을 축소시켜 버리는 파워포인트 자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수의 잘못된 기호(嗜好)” 역시 중요한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모든 프레젠테이션이 영업을 위한 것은 아니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파워포인트를 사용하면 일상적인 대화에 멀티미디어 효과를 쉽게 추가할 수 있어 한때 전문가들만 누릴 수 있었던 양식에 관한 의사결정 권한이 일반인들에게 확대된다. 초기 파워포인트 인쇄 광고의 표현을 빌리면, 이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사람이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만든다. 하지만 프레젠터들이 언제나 프레젠테이션 제작에 소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간과되었다.
중요한 점은 프레젠테이션의 용도가 더 이상 연말 회의나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여 컬러 슬라이드를 준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중요한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데 한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워포인트 서식과 클립 아트의 형태로 기계 속 유령처럼 살아남은 제니그래픽스의 비트너는 “파워포인트는 놀라울 정도로 정보와 관중의 범위를 확장시켰다”며 “프레젠테이션은 빠르고 급격하게 여러 채널을 만들어 냈다. 어떤 환경에서도 파워포인트를 본 적이 없는 학생은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파워포인트는 종교기관의 설교와 독후감을 작성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장례식과 결혼식에서도 사용된다. 2010년 마이크로소프트는 파워포인트가 전 세계적으로 10억 대 이상의 컴퓨터에 설치되었다고 발표했다.
오늘날 파워포인트가 전 세계 의사소통 방식에 미치는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지만, 다음과 같은 수치로 그 영향을 계량화할 수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로버트 개스킨스가 그래픽 사업부를 운영한 기간에 10배 성장했고, 그 이후도 15배 추가로 성장했다. 파워포인트와 같은 기술 기업의 수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더 이상 비공개로 진행되지 않는 대규모 프레젠테이션도 마찬가지다. 이제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은 전 세계 소비자가 커다란 관심 속에 적극적으로 시청하는 공개 행사에 가까워졌다. 그 누구도 더 이상 슬라이드 캐러셀이 막히는 사고에 대해 우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하지만 오류가 있는 기술 데모부터 체계적이지 못한 연출 등 문제 요소는 언제나 존재한다.
모든 요소가 제 역할을 할 때 기업은 훌륭한 프레젠테이션으로 시장을 주도하고 명성을 쌓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급격한 발전이 마이크로소프트만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역사상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업 프레젠테이션은 스티브 잡스가 맥월드 2007(Macworld 2007)에서 선보였던 아이폰 출시 발표이며 파워포인트와는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사용한 것은 맥북(MacBook)에 탑재된 키노트(Keynote)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글을 쓴 클레어 L. 에반스는 생태학, 기술 및 문화를 연구하는 작가이자 음악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