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 전기로 5배 열 내는 히트펌프 보일러…탈석유 난방 첫발
연료를 태우지 않고 공기 중의 열을 끌어와 집을 데우는 가정용 난방 기기가 실제 주거 환경에 설치됐다.
삼성전자는 지난 6월 25일 제주 애월 지역의 단독주택에 가정용 ‘EHS 히트펌프 보일러’를 설치하고, 이달 30일 해당 가구에서 고효율 난방 솔루션의 본격 확대를 알리는 현판식을 열었다고 31일 밝혔다. EHS 히트펌프 보일러는 자연 상태의 공기열과 전기를 이용해 실내 난방과 온수를 함께 공급하는 통합 기기다. 이 제품이 주목받는 이유는 에너지를 쓰는 방식에 있다. 기름이나 가스를 태워 열을 만드는 기존 보일러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투입한 에너지보다 많은 열을 낼 수 없어 효율이 100% 미만에 머문다.
반면 히트펌프는 열을 ‘만드는’ 대신 공기 중에 이미 있는 열을 ‘끌어와 옮기는’ 방식이어서, 투입한 전기보다 훨씬 많은 열을 낼 수 있다. 각국이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화석연료 난방을 전기 기반으로 바꾸는 ‘난방 전기화’에 속도를 내는 가운데, 이번 설치는 삼성전자가 그 흐름에 맞춰 가정용 시장에 본격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삼성전자 한국총괄 김용훈 상무는 “높은 난방 효율과 안정적인 고온수 공급 성능을 갖춘 솔루션”이라며 “실제 주거 환경에서 검증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효율 난방 시장 확대에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전기로 열을 ‘만드는’ 게 아니라 ‘옮긴다’
히트펌프의 핵심은 이름 그대로 ‘열을 퍼 올리는 펌프’라는 데 있다. 겨울철 바깥 공기가 차갑게 느껴져도 그 안에는 여전히 열에너지가 담겨 있다. 히트펌프는 이 공기 중의 열을 냉매(열을 실어 나르는 물질)에 흡수시킨 뒤, 압축해 온도를 끌어올려 실내로 옮긴다. 연료를 태워 없는 열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열을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방식이다. 에어컨이 실내 열을 밖으로 내보내는 원리를 거꾸로 돌린 것과 같다.
바로 이 원리 덕분에 효율이 100%를 넘어설 수 있다. 기름·가스 보일러는 태운 연료의 에너지 일부가 반드시 손실되므로 투입 대비 열 생산이 100%를 넘지 못한다. 하지만 히트펌프는 전기를 ‘열을 옮기는 펌프를 돌리는 데’만 쓰고, 실제 열의 상당 부분은 공짜인 공기에서 가져온다. 그래서 투입한 전기보다 몇 배 많은 열을 낼 수 있다.
이 효율을 나타내는 지표가 ‘계절성능계수(SCOP)’다. 1년간 공급한 총 난방 에너지를 그동안 쓴 소비 전력으로 나눈 값으로, 숫자가 클수록 적은 전기로 많은 열을 냈다는 뜻이다. 삼성전자 제품은 바닥 난방에 주로 쓰이는 35℃ 출수(내보내는 물 온도) 조건에서 SCOP 4.9를 기록했다. 소비 전력 대비 약 5배에 가까운 난방 에너지 효율을 냈다는 의미다. 더 뜨거운 물이 필요한 55℃ 출수 조건에서도 SCOP 3.78을 나타냈다. 다만 이 수치는 실제 사용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효율이 높은 만큼, 히트펌프의 오랜 약점으로 지적돼 온 것은 추운 날씨에서의 성능이다. 바깥이 너무 차가우면 끌어올 열도 줄어들어, 정작 난방이 절실한 한겨울에 힘을 못 쓰는 경우가 있었다. 삼성전자는 고효율 냉매 압축 기술을 적용해 영하 15℃에서도 최대 70℃의 고온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고 밝혔다. 추운 환경에서도 뜨거운 물을 낼 수 있어야 실제 겨울 난방 기기로 쓸 수 있다는 점을 겨냥한 것이다.
동파 대비도 보강했다. 물을 다루는 기기인 만큼 겨울철 배관이 얼면 고장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를 막기 위해 실외기 내부에는 전기 히터와 동파 방지 밸브를 넣었고, 제품 하단에도 물이 고이지 않고 빠지도록 돕는 히터를 추가로 달았다. 얼기 쉬운 지점마다 열선을 배치해 결빙 자체를 예방하는 구조다.

제주 실증과 ‘난방 전기화’의 의미
이번 설치가 갖는 의미는 단순한 신제품 출시를 넘어선다. 삼성전자는 시험실이 아니라 제주 애월의 실제 단독주택에 제품을 설치하고 현판식을 열었다. 소비자가 매일 생활하는 주거 환경에서 기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를 확인하는 실증(實證)의 성격을 띤다. 최초 설치 고객인 박종연 씨는 “겨울철 본격적인 난방이 시작되면 비용 절감 효과와 함께 온수 사용도 편할 것 같아 기대된다”고 말했다.
배경에는 ‘난방 전기화’라는 큰 흐름이 있다. 건물에서 나오는 탄소 배출의 상당 부분이 난방용 화석연료에서 발생하는데, 이를 줄이려면 기름·가스 보일러를 전기 기반 기기로 바꿔야 한다. 히트펌프는 이 전환의 핵심 기술로 꼽힌다. 전기를 쓰되 공기 중 열을 활용해 효율이 높아, 같은 난방을 하면서도 에너지 사용과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용 편의도 실제 보급을 좌우하는 요소다. 삼성전자 제품은 히트펌프 외관에 직관적인 터치 디스플레이를 달아 주요 기능을 손으로 조작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 스마트싱스 앱을 연동해 실내 온도와 출수 온도를 확인하고 원격으로 제어하는 기능도 넣었다. 낯선 기기일수록 조작이 쉬워야 일반 가정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설계다.
시장 관점에서 보면, 히트펌프 보일러는 이미 유럽 등에서 화석연료 난방의 대안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분야다. 삼성전자가 가정용 시장에 본격 진입한 것은, 국내에서도 난방 기기의 축이 연소 방식에서 전기 기반 고효율 방식으로 옮겨갈 가능성을 내다본 행보로 볼 수 있다. 삼성전자는 난방 전기화 확대 흐름에 맞춰 히트펌프 기반 난방 솔루션의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히트펌프가 기존 보일러를 얼마나 대체할지는 앞으로의 과제로 남는다. 초기 설치 비용,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의 상대적 수준, 주택 구조에 따른 설치 조건 등이 실제 보급 속도를 좌우한다. 이번 제주 설치는 실제 주거 환경에서 성능과 편의를 검증하는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실사용 데이터가 쌓이면서 그 경쟁력이 판가름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