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AIST, 150℃에서 반도체 ‘결 맞춰’ 쌓는 저온 제조기술 개발
미래 반도체는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소재를 한 칩에 층층이 쌓아 만드는데, 이때 필요한 높은 열이 아래층을 손상시키는 것이 오랜 걸림돌이었다.
KAIST 생명화학공학과 서준기 교수 연구팀은 한양대학교 송봉근 교수팀, 미국 라이스대학교 이모 한(Yimo Han) 교수팀과 공동으로, 150℃의 낮은 온도에서 ‘반데르발스 소재(원자층을 종이처럼 얇게 겹친 차세대 2차원 반도체 소재)’ 위에 새로운 반도체를 손상 없이 정밀하게 쌓는 제조기술을 개발했다고 27일 밝혔다.
반도체 성능은 결국 원자가 얼마나 규칙적으로 배열되느냐에 좌우되는데, 지금까지 이렇게 결을 맞춰 쌓으려면 수백 도의 고온이 필요했고 그 열이 아래층을 망가뜨렸다. 이번 성과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 온도를 150℃까지 낮추면서도 결정을 가지런히 정렬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미 완성된 반도체 구조를 태우지 않고 그 위에 새 기능층을 얹을 수 있다는 뜻으로, 여러 소재를 한 칩에 쌓아 올리는 차세대 AI·저전력 반도체와 광전자소자 개발의 새 길을 연 성과로 평가된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 7월 24일 자에 실렸다.
왜 ‘낮은 온도’가 미래 반도체의 열쇠인가
반도체 기술이 미세화의 한계에 다가서면서, 성능을 높이는 다음 전략으로 떠오른 것이 ‘쌓기’다. 하나의 평면에 회로를 빽빽이 새기는 대신,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소재를 위로 층층이 올려 한 칩에 집적하는 방식이다. 이때 각 층이 만나는 경계면(계면)을 원자 수준으로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 성능을 좌우한다.
이 쌓기에 특히 유망한 재료가 반데르발스 소재다. 원자층이 여러 장 겹쳐 있지만 층과 층 사이가 약하게 붙어 있어, 종이처럼 얇게 떼어낼 수 있는 2차원 반도체다. 서로 다른 소재를 자유롭게 겹칠 수 있어 차세대 AI 반도체와 초저전력 반도체의 핵심 소재로 꼽힌다. 문제는 이 소재의 표면이 화학적으로 너무 안정적이라는 데 있다. 반응성이 낮아 그 위에 새 반도체를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런히 자라게 하기가 어렵다.
여기서 핵심 개념이 ‘에피택시(epitaxy·결 맞춰 자라는 성장)’다. 아래층 결정의 원자 배열을 따라 위층이 같은 방향으로 정렬돼 자라는 방식을 말한다. 벽돌을 아무렇게나 쌓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벽돌을 같은 방향으로 반듯하게 쌓는 것과 같아, 전기가 더 잘 흐르고 반도체 성능도 높아진다. 그런데 이 에피택시는 그동안 주로 고온의 기상 공정으로만 구현됐고, 그 과정에서 소재 간 열팽창 차이로 계면이 변형되거나 아래층이 열에 손상되는 한계가 있었다.
대안으로 주목받은 것이 원자층증착법(ALD)이다. 반도체 원료 분자인 전구체(precursor)를 표면에 차례로 공급해 두께를 원자 한 층 단위로 조절하며 넓은 면적에 균일하게 쌓는 공정으로, 온도가 낮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반응성이 낮은 반데르발스 표면에서는 전구체가 충분히 머물지 못해 결정이 시작조차 되기 어려웠고, 온도까지 낮추면 원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자라 성능 좋은 반도체를 만들기 힘들었다. 저온·정밀·대면적이라는 ALD의 장점을 살리면서 결을 맞추는 일은 양립하기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었다.

안 붙던 표면을, 스스로 결 맞추는 ‘거푸집’으로
연구팀의 발상 전환이 여기서 나왔다. 반응성이 낮아 ‘불리하다’고 여겨졌던 반데르발스 표면의 성질을 오히려 강점으로 뒤집어 해석한 것이다. 전구체가 표면에 강하게 달라붙지 못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표면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핵심 원리는 표면의 원자 배열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분극’이다. 반데르발스 표면은 원자 배열에 따라 바깥 방향으로 약한 전기적 쏠림이 생기는데, 이 힘이 전구체를 표면에 살짝 붙잡아 안정화시킨다. 강하게 고정하지는 않아 전구체는 표면을 따라 이동할 수 있고, 그러다 에너지적으로 가장 안정한 자리를 스스로 찾아 그곳에서 결정 성장을 시작한다. 표면을 단순한 바닥이 아니라, 전구체가 어디에 자리 잡을지를 안내하는 ‘거푸집(템플릿)’으로 활용한 셈이다. 연구팀은 이 방식을 ‘확산 유도형 에피택셜 원자층증착법(Epi-ALD)’이라고 이름 붙였다.
모델 물질로는 텔루륨(Te)을 썼다. 텔루륨은 원자들이 나선형 사슬로 배열된 반도체로, 전기를 한 방향으로 잘 전달하는 높은 정공 이동도와 빛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광전자 특성을 함께 갖춰 광검출기·LED 같은 소자의 핵심 소재로 주목받는다.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도 결정이 만들어져, 저온 에피택시가 가능한지 검증하기에 적합한 물질이기도 했다.
그 결과는 정밀했다. 텅스텐 화합물(WSe₂) 위에 자란 텔루륨은 약 1.4Å(옹스트롬·1억 분의 1cm)의 깨끗한 계면 간격을 보였고, 두 물질의 원자 배열 간격이 3.6% 이상 차이 나는데도 계면이 억지로 늘어나거나 찌그러지는 변형을 0.2% 이하로 억눌렀다. 아래층을 태우지 않는 낮은 온도에서도, 두 소재가 서로 뒤틀리지 않고 깔끔하게 맞물린 고품질 계면을 만들어냈다는 의미다.
여러 소재에서 통했고, 실제 소자로 이어졌다
주목할 점은 성장 ‘방향’까지 조절했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아래층 거푸집의 결정 대칭성을 이용해 텔루륨이 자라는 방향을 유도했다. 결정 구조가 세 방향으로 반복되는 템플릿 위에서는 텔루륨이 세 방향으로 정렬됐고, 대칭성이 낮은 레늄 화합물(ReS₂·ReSe₂) 위에서는 한 방향으로 우세하게 정렬됐다. 무작위로 흩어지지 않고 아래층의 결을 따라 자란다는 것을, 서로 다른 표면을 비교하며 입증한 것이다.
방향 제어가 중요한 이유는 텔루륨이 ‘이방성’ 물질이기 때문이다. 결정이 어느 방향으로 배열되느냐에 따라 전기와 빛에 대한 반응이 크게 달라지는 성질이다. 방향이 제멋대로면 소재 본래의 성능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소자마다 편차가 커진다. 연구팀은 방향을 제어함으로써 단결정에 가까운 텔루륨 박막을 구현했고, 카이랄 구조를 가진 물질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양자 수송 현상(‘카이랄 이상’ 신호)까지 확인해 결정 품질이 높다는 것을 뒷받침했다.
이 기술은 텔루륨 한 종류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같은 방법을 텅스텐(WSe₂)·몰리브덴(MoS₂)·레늄(ReSe₂) 화합물과 운모(mica) 등 다양한 반데르발스 소재 위에서도 적용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특정 재료에만 통하는 요령이 아니라 여러 차세대 반도체 소재에 폭넓게 쓸 수 있는 범용 제조 전략임을 보여준 것이다. 나아가 넓은 면적의 운모 위에 균일한 박막을 성장시켜, 실험실 샘플을 넘어 대면적 공정으로 확장할 가능성도 검증했다.
무엇보다 이 기술은 연구실 수준에 머물지 않았다. 연구팀은 이렇게 만든 반도체로 전류의 흐름을 제어하는 핵심 소자인 트랜지스터와, 빛을 감지하는 광전자소자를 직접 제작했다. p형 트랜지스터에서는 소자를 켜고 끌 때의 전류 차이(온·오프 전류비)가 1만 이상으로 나타났고, 텔루륨과 레늄 화합물을 수직으로 접합한 소자에서는 빠른 광응답 특성을 확인했다. 실제로 작동하는 전자·광소자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입증한 결과다.
서준기 교수는 “이번 연구는 낮은 온도에서도 반데르발스 소재 위에 고품질 반도체를 손상 없이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보여준 성과”라며 “앞으로 다양한 차세대 반도체를 하나의 칩 위에 자유롭게 집적하는 핵심 제조기술로 활용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