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EU 스마트 가전 에너지 행동강령 국내 최초 서명…전력망 연동 가전 생태계 진입
유럽이 가전제품을 전력망과 연결해 전력 수요를 실시간으로 조절하는 에너지 관리 인프라를 제도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가운데, 이 생태계에 진입하는 것이 유럽 가전 시장 경쟁력의 새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EU 집행위원회 산하 공동연구센터(JRC)가 주도하는 자발적 협약 프로그램인 ‘스마트 가전 에너지 행동강령(EU CoC)’에 국내 기업 최초로 서명하고, 세탁건조기·세탁기·식기세척기 3개 제품군을 EU 에너지 등록 시스템(EPREL)의 ‘에너지 스마트 가전(ESA)’ 항목에 등재했다고 14일 밝혔다.
전력망에 연결되는 가전: EU가 만들고 있는 에너지 수요 관리 생태계
EU CoC(Code of Conduct for Energy Smart Appliances)는 단순한 에너지 효율 인증과는 결이 다른 프레임워크다. 전통적인 에너지 효율 등급은 가전 한 대가 얼마나 전기를 적게 쓰느냐를 측정하지만, EU CoC는 가전이 전력망(grid)과 통신하며 전력 수요가 많은 시간대를 피해 작동을 조정하는 능력에 초점을 맞춘다. 전력 사용이 저녁 시간대에 집중되는 피크(peak)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세탁기나 식기세척기 같은 가전이 스스로 전력 부하가 낮은 시간대를 골라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의 제도적 기반이 되는 것이 EPREL(European Product Registry for Energy Labelling, EU 에너지 라벨링 제품 등록 시스템)이다. EU는 올해 3월부터 EPREL에 전력망과 연동해 에너지 사용을 최적화할 수 있는 제품을 ‘에너지 스마트 가전(Energy Smart Appliance, ESA)’으로 별도 구분해 소비자가 검색·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EPREL에 ESA로 등록된 고효율 스마트 가전에 보조금이나 세제 혜택을 제공하는 정책도 운영 중이다.
EU CoC 서명의 실질적 의미는 유럽 전력회사들과의 협력 통로가 열린다는 데 있다. EU는 전력회사들이 EU CoC에 서명한 가전 제조사와 에너지 절감 협력을 추진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미 영국 브리티시 가스(British Gas), 네덜란드 쿨블루(CoolBlue) 등 유럽 주요 에너지 기업들과 파트너십을 맺고 전기료 절감 혜택을 제공하고 있으며, 이번 서명을 계기로 협력 범위를 더욱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맞춤 예약과 AI 절약모드: 전력망 연동 기능의 구현 방식
삼성전자가 이번에 EPREL ESA로 등록한 제품은 일체형 세탁건조기, 세탁기, 식기세척기 3개 품목이다. 이 제품들의 공통 핵심 기능은 ‘맞춤 예약(Optimal Scheduling)’이다. 전력망과 연동돼 부하가 적은 시간대에 기기 사용을 제안하는 방식으로, 사용자가 작동 시간을 직접 정하지 않아도 전력 수요가 낮은 시간을 자동으로 찾아 가전을 가동한다. 삼성전자는 향후 EHS 히트펌프(heat pump, 냉매의 열 이동 원리를 이용해 냉난방과 온수를 고효율로 생산하는 장치)와 에어컨으로 ESA 등록 제품군을 확대할 계획이다.
제품 자체의 에너지 효율도 병행 강화됐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유럽 에너지 소비효율 최고 등급인 A등급 대비 에너지 사용량을 최대 20% 추가 절감하는 ‘비스포크 AI 식기세척기’를 출시했으며, 오는 6월에는 A등급 대비 에너지 사용량을 최대 65% 추가 절감하는 ‘비스포크 AI 세탁기’를 유럽에 출시할 예정이다. A등급은 유럽에서 가전 에너지 효율의 최고 기준점으로, 그 대비 추가 절감 수치는 시장에서의 상대적 경쟁력을 나타낸다.
‘AI 절약모드’를 설정하면 냉장고는 최대 15%, 세탁기는 최대 70%, 에어컨은 최대 30%까지 에너지 사용량을 줄일 수 있다고 삼성전자는 밝혔다. 행정 코스 종료 후에는 소요 시간과 에너지 사용량 등의 정보를 그래프로 제공해 에너지 사용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도 탑재됐다. 다만 에너지 절감량은 모델별로 상이하며 사용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삼성전자는 설명했다.

국내 최초 서명의 전략적 의미: 유럽 에너지 규제 흐름에 대한 선제적 대응
이번 서명이 갖는 무게는 단순한 인증 획득을 넘어선다. EU의 에너지 전환 정책이 가전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는 상황에서, EU CoC 서명은 유럽 에너지 규제 생태계 안에 공식 행위자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국내 기업 중 처음이라는 점은 이 생태계의 진입 장벽이 낮지 않음을 시사한다. EU CoC가 자발적 협약임에도 전력사 파트너십이나 보조금 정책과 연동되는 구조 때문에, 서명 여부가 유럽 시장 접근성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향으로 제도가 설계돼 있다.
양혜순 삼성전자 DA사업부 부사장은 “이번 서명은 삼성전자의 고효율 기술 경쟁력과 에너지 절감 생태계 확대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이를 기반으로 유럽 내 다양한 전력회사들과 에너지 협력을 더욱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흐름이 한국 시장에서도 유사한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다만 유럽에서의 전력망 연동 가전 생태계 구축 경험이 향후 다른 지역의 에너지 정책 변화에 대응하는 기술·제도적 기반으로 활용될 가능성은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