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AIST, 암으로 빠지는 근육·체중 지키는 치료제 후보 개발…항암치료 체력 보존 길 연다
암 환자는 먹어도 살이 빠진다. 입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몸이 영양분을 쓰는 방식 자체가 뒤틀려 근육과 지방이 녹아내린다. 이 ‘몸의 소모’를 멈추는 열쇠가 뇌 속 작은 수신기에 있었다.
암으로 인해 식욕이 떨어지고 근육·지방이 계속 줄어드는 ‘암 악액질’을 완화하는 치료제 후보가 개발됐다. KAIST 생명과학과 김호민 교수 연구팀은 의과학대학원 송민호 교수(교원창업기업 토르 테라퓨틱스 대표) 연구팀과 공동으로, 암 악액질을 완화하는 항체 후보물질 ‘GB2Ab’를 개발했다고 30일 밝혔다.
암 악액질(cancer cachexia)은 단순히 적게 먹어 살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암 때문에 몸이 영양분과 에너지를 쓰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근육과 지방이 함께 줄어드는 합병증이다. 영양 공급만으로는 회복이 어려워 환자의 일상과 항암치료를 가로막는다. 연구팀은 이 소모를 일으키는 신호를 차단하는 항체를 만들어 생쥐 실험에서 효과를 확인했으며,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10월 28일 게재됐다.
먹어도 빠지는 ‘암 악액질’, 신호가 문제였다
암 악액질은 진행성 암 환자에게 흔한 심각한 합병증이다. 식욕이 떨어지는 데다 체중과 골격근, 지방이 계속 줄어든다. 문제는 음식 섭취를 늘려도 충분히 회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환자의 체력과 삶의 질이 떨어지고, 항암치료를 이어가기도 어려워진다.
이 과정에 관여하는 물질 중 하나가 ‘GDF15’라는 단백질이다. 암이나 심한 스트레스로 혈액 속 GDF15가 늘어나면, 뇌 아래쪽 뇌간에 있는 ‘GFRAL’ 수용체에 달라붙는다. 수용체는 특정 물질과 결합해 신호를 받아들이는 단백질이다. GDF15가 신호를 보내는 쪽이라면, GFRAL은 이를 받아들이는 ‘수신기’인 셈이다. 이 수신기가 신호를 받으면 식욕이 떨어지고 에너지를 과도하게 쓰게 된다.
기존 치료 전략은 신호 물질 자체를 노렸다. 혈액 속 GDF15를 직접 붙잡아 중화하는 항체가 임상시험에서 효과를 보이며 이 신호가 유효한 표적임이 확인됐다. 하지만 병적 상태에서는 혈중 GDF15가 정상보다 100배 이상 늘 수 있는 데다, 종양이 계속 새로 만들어 내기 때문에, 넘쳐나는 신호 물질을 꾸준히 잡으려면 많은 약을 자주 투여해야 하는 부담이 따랐다.

신호 물질 대신 ‘수신기’를 막다…구조까지 규명
연구팀은 발상을 뒤집었다. 넘쳐나는 신호 물질을 일일이 붙잡는 대신, 그 신호를 받아들이는 GFRAL 수용체를 직접 틀어막는 ‘수용체 중심’ 전략을 택했다. 신호가 아무리 많아도 받는 쪽을 막으면 전달되지 않는다는 발상이다. 연구팀이 개발한 항체 GB2Ab는 이 수용체에 강하게 달라붙어, 식욕 저하와 과도한 에너지 소모로 이어지는 신호 전달을 억제한다.
어떻게 막는지도 원자 수준에서 밝혀냈다. 연구팀은 항체와 수용체가 결합한 입체 구조를 분석해, 항체가 단순히 수용체 표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GFRAL의 구조 자체를 바꾸면서 파고들어 결합하는 독특한 방식을 확인했다. 이 결합은 매우 강하고 쉽게 떨어지지 않으며, 항체가 달라붙는 자리가 신호 전달에 필요한 핵심 부위와 겹쳐 신호 복합체 형성을 물리적으로 가로막는다.
이 구조는 약으로 다듬는 설계도가 됐다. 연구팀은 밝혀낸 입체 구조를 바탕으로 항체를 사람에게 쓸 수 있는 형태로 바꾸고, 생산 효율과 안정성 등 의약품으로서의 개발 가능성을 함께 높였다. 작동 원리를 알아낸 덕분에, 효과는 유지하면서 만들기 쉽고 안정적인 항체로 개선할 수 있었다.

생쥐서 체중 20%·악력 30% 개선…”치료 이어갈 힘 보존”
효과는 대장암 세포를 이식해 암 악액질이 생긴 생쥐에서 확인됐다. 항체를 투여한 생쥐는 음식 섭취량이 회복됐고, 종양 무게를 뺀 체중이 투여하지 않은 생쥐보다 약 20% 높았다. 근육과 지방의 손실도 줄었다. 이미 악액질이 시작된 뒤에 투여했는데도 여러 지표가 개선됐다는 점에서, 예방이 아니라 진행 중인 증상을 되돌리는 효과를 보인 것이다.
실제 힘에서도 개선이 나타났다. 항체를 투여한 생쥐의 악력(물체를 쥐는 힘)은 투여하지 않은 생쥐보다 약 30% 높아, 정상 생쥐의 약 90% 수준에 도달했다. 체중뿐 아니라 실제로 힘을 내는 능력까지 회복된 셈이다. 특히 항체를 투여하자 몸의 긴장과 에너지 사용을 조절하는 교감신경의 과도한 활동도 줄었다. ‘덜 먹게 하는 신호’뿐 아니라, 에너지를 지나치게 태우는 신호까지 함께 낮춘 것이다.
이 치료제 후보는 종양 자체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암으로 몸이 쇠약해지는 것을 막는 데 목적이 있다. 김호민 교수는 “이번 연구는 암 악액질에 관여하는 신호를 차단하는 항체를 개발하고, 작동 원리와 효과를 생쥐 실험에서 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식욕 회복뿐 아니라 근육과 지방의 손실을 줄이고 신체 기능을 지켜, 암 환자가 치료를 이어갈 힘을 보존하도록 돕는 치료제로 발전시키고자 한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기존 항암제, 특히 면역항암제와 함께 썼을 때의 효과를 확인하는 후속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