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과거·최신 기억 전환하는 뇌 ‘신경 스위치’ 규명…치매·인지 유연성 저하 치료 새 가능성
우리 뇌가 수많은 과거 기억 가운데 현재 상황에 맞는 최신 정보만 골라 떠올리는 원리를 규명한 연구 결과가 나왔다. 치매나 인지 저하 환자가 과거 기억에 머무는 현상의 신경학적 근거를 신경 회로 수준에서 처음 제시한 발견이다.
기억 인출은 저장된 흔적을 단순히 재생하는 수동적 과정이 아니라, 뇌가 여러 기억 사이에서 어떤 정보를 떠올릴지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조절 과정이다. KAIST는 생명과학과 한진희 교수 연구팀이 내측중격(Medial Septum, MS)에서 내측내후각피질(Medial Entorhinal Cortex, MEC)로 이어지는 신경 회로가 과거 기억과 최신 기억 사이를 전환해 상황에 맞는 정보를 선택하는 ‘신경 스위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고 17일 밝혔다. 기억 인출을 신경 회로 수준에서 능동적 선택 과정으로 재정의한 이번 결과는 신경과학 분야 국제 학술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Nature Neuroscience)’ 4월 29일자에 게재됐다.
뇌가 최신 기억을 골라 떠올리는 ‘신경 스위치’ 회로 규명
우리는 매일 새로운 경험을 통해 기억을 업데이트하며 살아간다. 어제보다 오늘 방문한 식당이 더 만족스러웠다면 뇌는 기존 기억을 수정해 새로운 정보를 반영한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 기억 사이에서 필요한 정보를 골라내는 능력은 의사결정, 문제 해결, 미래 예측, 논리적 추론과 같은 고차원 인지 기능의 근간을 이룬다. 그러나 뇌가 어떤 원리로 기억을 구분하고 전환하는지는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문제였다.
연구팀은 뇌 깊숙한 곳에 위치한 내측중격(Medial Septum, MS, 기억과 학습을 조절하는 뇌 영역)에 주목했다. 내측중격은 해마(hippocampus, 새로운 기억을 만들고 저장하는 핵심 뇌 부위)의 활동 리듬을 조절해 뇌가 정보를 효과적으로 저장하고 불러오도록 돕는 ‘조율자’ 역할을 하는 영역이다.
분석 결과 내측중격의 특정 신경세포가 내측내후각피질(Medial Entorhinal Cortex, MEC, 해마와 연결돼 기억 정보를 처리하는 뇌 영역)로 신호를 보낼 때 뇌는 최신 기억을 더 잘 떠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영역을 잇는 이 신경 회로가 최신 정보 인출의 핵심 통로라는 점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연구팀은 두 영역 사이를 오가는 신호의 강도와 시점을 정밀하게 측정해 이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빛으로 회로 차단하자 실험동물이 ‘업데이트 이전 행동’으로 회귀
연구팀은 회로의 역할을 직접 검증하기 위해 빛을 이용해 신경 회로를 인위적으로 차단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빛에 반응하는 단백질을 신경세포에 발현시키면 빛 자극만으로 특정 회로의 활동을 정밀하게 끄고 켤 수 있어, 회로 하나의 기능을 분리해 관찰할 수 있다.
회로를 차단하자 실험동물은 최신 정보를 활용하지 못하고 과거 방식대로 행동했다. 동시에 기억 저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마의 신경 활동 역시 업데이트 이전 상태로 되돌아갔다. 행동뿐 아니라 뇌 내부의 실제 신호 패턴까지 과거로 회귀했다는 점에서, 이 회로가 기억 전환을 결정짓는 인과적 요소임이 분명해졌다.
이는 내측중격-내측내후각피질을 잇는 신경 회로가 여러 기억 가운데 현재 상황에 필요한 최신 정보를 선택하는 ‘신경 스위치’ 역할을 한다는 점을 행동과 신경 활동 양쪽에서 입증한 결과다. 연구팀은 이번 결과가 뇌의 기억 인출이 단순한 흔적 재생이 아니라 능동적 선택 과정임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온라인 상태’ 길수록 기억 인출 향상…퇴행성 뇌질환 치료 단초
연구팀은 뇌의 활성 상태에 따른 기억 수행 능력도 함께 분석했다. 뇌는 활발히 정보를 처리하는 ‘온라인 상태'(세타파, 학습과 집중 시 활성화되는 뇌파)와 휴식에 가까운 ‘오프라인 상태'(델타파, 수면이나 휴식 시 나타나는 느린 뇌파)를 반복적으로 오간다. 두 상태의 전환 양상과 기억 인출 능력 사이의 관계가 분석의 초점이었다.
분석 결과 온라인 상태가 길게 유지될수록 실험동물은 최신 기억을 더 잘 떠올렸다. 반대로 온라인-오프라인 상태 전환이 잦을수록 기억 인출 능력은 크게 떨어졌다. 뇌의 특정 리듬과 활성 상태가 효과적인 기억 인출을 결정하는 신경학적 지표라는 점이 새롭게 드러난 것이다.
한진희 교수는 “이번 연구는 우리 뇌가 수많은 경험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고 활용하는 원리에 대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며 “기존에는 기억 인출을 단순히 저장된 흔적을 재생하는 과정으로 이해했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뇌가 경쟁하는 기억들 사이에서 최신 정보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조절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번 결과가 치매·알츠하이머병과 같은 퇴행성 뇌질환 환자의 기억력 감퇴와 인지 유연성 저하를 개선하는 새로운 치료 기술 개발로 이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