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ST, 전류만으로 전자 스핀 생성하는 원리 규명…자석 없는 스핀 소자 설계 토대
반도체 소자가 전하의 이동으로 정보를 처리한다면, 스핀트로닉스(spintronics)는 전자의 ‘회전 방향’인 스핀을 정보 단위로 활용해 더 적은 에너지로 더 빠른 연산을 구현하려는 차세대 기술이다. 그 핵심 과제 중 하나가 자석 없이 전기 신호만으로 스핀을 생성하는 것인데, 나선형 물질에서 이것이 가능하다는 현상은 알려져 있었지만 전류가 스핀을 만들어내는 구체적 과정은 규명되지 않았다.
UNIST 물리학과 박노정 교수팀은 나선형 셀레늄 나노선에 전류가 흐를 때 전자의 직선 운동이 궤도각운동량으로 전환되고, 이것이 스핀 분극으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실시간 양자 계산으로 추적했다고 14일 밝혔다. 이번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ACS Nano에 4월 23일 게재됐다.
풀리지 않던 난제: 나선형 물질이 스핀을 거른다는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인지는 몰랐다
스핀트로닉스는 전자가 지닌 두 가지 성질인 ‘전하’와 ‘스핀’을 모두 정보 처리에 활용하는 기술이다. 스핀(spin)이란 전자가 마치 팽이처럼 자전하는 성질로, 방향이 위 또는 아래 두 가지 상태를 가져 0과 1을 나타낼 수 있다. 현재 반도체는 전하의 이동만 이용하지만, 스핀까지 활용하면 전력 소모를 줄이면서도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어 차세대 소자 기술로 주목받는다.
문제는 스핀 상태를 조절하는 데 통상 강한 자기장이나 무겁고 복잡한 자기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나선형(키랄) 구조를 가진 물질에서는 전류를 흘리는 것만으로 특정 방향의 스핀을 가진 전자가 우세하게 나타나는 현상, 즉 키랄성 유도 스핀 선택성(CISS, Chirality-Induced Spin Selectivity)이 관찰돼 왔다. 키랄성(Chirality)이란 왼손과 오른손처럼 거울에 비추면 닮았지만 서로 포개지지 않는 구조적 성질을 말한다. DNA, 아미노산, 나사 모양의 셀레늄·텔루륨 나노선이 대표적인 키랄 물질이다.
그러나 왜, 어떤 과정을 통해 전류가 스핀을 만들어내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기존 이론은 키랄 물질이 특정 스핀을 걸러내는 ‘스핀 필터’처럼 작동한다고 설명해 왔지만, 전류가 흐르는 순간부터 스핀이 생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직접 추적하는 계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물성 물리학의 핵심 개념 대부분이 전류가 흐르지 않는 정적 평형 상태를 기준으로 정립돼 있어, 전류가 만들어내는 비평형 상태에서 전자의 내부 자유도가 어떻게 바뀌는지는 이론적으로도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선 운동이 회전 운동으로: 전류가 스핀을 만드는 세 단계
연구팀은 나선형 구조를 가진 삼방정 셀레늄(Se) 나노선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 물질은 나사처럼 조금씩 회전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나사 회전 대칭(Screw Rotation Symmetry) 구조를 갖는다. 정지 상태에서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전자들이 쌍을 이루어 스핀이 상쇄된다. 이는 시간역전대칭(Time-Reversal Symmetry)에 의해 서로 반대 운동량을 가진 전자 상태들이 항상 짝을 이루는 크라머스 축퇴(Kramers’ Degeneracy) 원리로 설명된다.
연구팀이 사용한 핵심 도구는 실시간 시간 의존 밀도범함수이론(rt-TDDFT, real-time Time-Dependent Density Functional Theory)이다. 전통적인 양자 계산이 정지 상태나 약한 자극에 대한 반응을 분석했다면, rt-TDDFT는 전류가 흐르는 동안 전자의 상태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아토초(attosecond, 10⁻¹⁸초, 즉 1초의 1000경분의 1) 단위 간격으로 직접 계산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이 방법으로 전하 전류, 궤도각운동량, 스핀각운동량의 변화를 시간 순서대로 추적했다.
계산 결과, 전류가 스핀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세 단계로 진행된다. 전기장을 가해 전류가 흐르면 전자의 직선 운동량 일부가 나선형 구조를 따라 ‘회전운동’ 성격의 궤도각운동량(orbital angular momentum,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공전하는 것과 유사한 회전 운동량)으로 전환된다. 이 궤도각운동량이 스핀-궤도 결합(Spin-Orbit Coupling, 전자의 공전 성격의 궤도 운동과 자전 성격의 스핀이 양자역학적으로 서로 연결되는 상호작용)을 통해 마지막으로 스핀 분극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키랄 구조가 없는 직선형 SnH₂ 나노선에서는 같은 조건에서 스핀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스핀-궤도 결합을 제거하면 궤도각운동량만 나타나고 스핀은 발현되지 않았다. 두 요소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 비교 계산을 통해 확인됐다.
전기장을 끊어도 스핀이 유지된다: 전류 자체가 스핀의 원인임을 확인
이번 연구에서 도출된 중요한 계산 결과 중 하나는 전기장을 끊어도 충분한 전류가 남아 있으면 스핀과 궤도각운동량이 계속 유지된다는 점이다. 만약 외부 전기장이 직접 스핀을 만들었다면 전기장을 끊는 순간 스핀도 사라져야 하지만, 전기장 제거 후에도 스핀이 지속됐다. 이는 스핀 분극의 직접적인 원인이 전기장 자체가 아니라 나선형 구조를 따라 흐르는 전류임을 보여주는 결과다. 또한 이 변화는 전류 크기가 특정 임계값(I_th)을 넘어야만 뚜렷하게 나타났으며, 스핀과 궤도각운동량이 커질수록 전류가 다소 감소하는 현상도 관찰됐다. 연구팀은 이를 전자의 직선 운동량이 회전 운동 성격의 각운동량으로 전환되는 과정으로 해석했다.
이번 연구의 의미는 오랫동안 현상의 존재는 알았지만 메커니즘이 불분명했던 CISS 현상의 물리적 기원을 제일원리 계산 수준에서 처음으로 직접 추적했다는 데 있다. 박노정 교수는 “이번 연구는 나선형 물질에서 특정 스핀을 가진 전자가 더 잘 이동하는 현상인 키랄 유도 스핀 선택성을 이해하고, 별도의 자석 없이 전기 신호로만 작동하는 스핀트로닉스·오비트로닉스 소자를 설계하는 데 기초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UNIST 박노정 교수팀이 미국 미주리대학교,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공동으로 수행했으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연구재단 기초연구사업 및 산업통상자원부 KIAT 인력양성사업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연구팀이 활용한 rt-TDDFT 기반 실시간 각운동량 추적 방법은 앞으로 다른 키랄 분자나 위상 물질에서 전류가 스핀과 궤도 운동을 어떻게 바꾸는지 분석하는 데도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