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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대용량 배터리 전해질 생산 67% 단축…AI 데이터센터 ESS 병목 뚫었다

초대형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바나듐 전해질을 만드는 시간을 3분의 1로 줄이는 공정이 나왔다. 상용화의 가장 큰 생산 병목을 풀었다.

전기를 대량으로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공급하는 초대형 배터리의 핵심 소재를, 기존보다 훨씬 빠르고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공정 기술이 개발됐다.

KAIST 생명화학공학과 김희탁 교수 연구팀은 대용량 에너지저장장치(ESS)의 유력 후보인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VRFB)’의 핵심 전해질을 만드는 시간을 67% 단축하는 공정을 개발했다고 5일 밝혔다. 이 성과가 주목받는 배경에는 AI가 불러온 전력 수요 급증이 있다. 24시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AI 데이터센터가 늘면서, 태양광·풍력처럼 생산이 들쭉날쭉한 재생에너지를 대량으로 저장했다가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대용량 ESS의 중요성이 커졌다. 그중에서도 바나듐 흐름전지는 화재 위험이 거의 없고, 전해질을 담는 탱크만 키우면 저장 용량을 쉽게 늘릴 수 있어 초대형 배터리로 유력하게 꼽혀 왔다. 문제는 배터리의 ‘연료’ 역할을 하는 바나듐 전해질을 최적 상태로 만드는 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 이것이 상용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는 점이다.

연구팀은 이 생산 과정에서 반응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는 ‘진짜 병목’ 지점을 세계 최초로 찾아내고, 그 구간만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바꿔 생산 시간을 대폭 줄였다. 연구 결과는 에너지 분야 국제학술지 《어드밴스드 에너지 머티리얼즈》에 실렸으며, 학술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표지논문으로 선정됐다.

AI 데이터센터가 부른 ‘거대한 배터리’ 수요

재생에너지에는 근본적인 약점이 있다. 태양광은 해가 떠 있을 때만, 풍력은 바람이 불 때만 전기를 만든다. 생산이 일정하지 않아, 전기가 남을 때 저장했다가 부족할 때 꺼내 쓰는 장치가 없으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어렵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이 대용량 ESS다.

특히 AI 시대에 들어 이 필요가 더 절실해졌다. AI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쉬지 않고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데, 이를 재생에너지로 감당하려면 남는 전기를 대량으로 저장해 두었다가 끊김 없이 공급하는 초대형 배터리가 뒷받침돼야 한다. 대용량 ESS가 AI 인프라의 숨은 기반 시설로 떠오른 이유다.

여기서 유력하게 꼽히는 것이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다. 흔히 쓰는 리튬이온 배터리와 달리, 전해질(전기를 저장하는 액체)을 외부 탱크에 담아 순환시키는 구조다. 이 방식의 장점은 두 가지다. 화재 위험이 거의 없어 안전하고, 탱크 크기만 키우면 저장 용량을 쉽게 늘릴 수 있어 대용량화에 유리하다. 장시간·대용량 저장이 필요한 용도에 잘 맞는다.

하지만 상용화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있었다. 이 배터리는 전해질 자체가 에너지를 저장하는 매질이어서, 전해질을 만드는 비용이 전체 시스템 가격을 좌우한다. 특히 배터리를 처음 구동할 때 쓰는 ‘V3.5+ 전해질’을 최적 상태로 만드는 과정이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어, 대량 생산의 가장 큰 병목으로 지적돼 왔다.

연구 이미지 | AI 생성

병목은 어디였나

기존 생산 공정은 두 단계로 이뤄졌다. 먼저 ‘화학적 환원’으로 전해질을 만든다. 환원제를 넣어 바나듐 이온이 전자를 얻도록 하는 화학 반응이다. 그다음 ‘전기화학적 환원’ 단계를 거친다. 전기를 흘려 바나듐 이온의 전자 상태를 원하는 수준으로 정밀하게 맞추는 공정이다. 문제는 이 마무리 단계인 전기화학적 환원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데 있었다.

연구팀의 핵심 성과는 ‘왜 오래 걸리는지’를 정확히 짚어낸 데 있다. 연구팀은 전해질을 만드는 화학 반응이 특정 지점에서 갑자기 속도가 급격히 느려진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고속도로를 잘 달리던 차량이 특정 병목 구간에서 갑자기 정체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 병목 지점은 ‘평균 산화수’로 특정됐다. 산화수는 바나듐 이온이 전자를 얼마나 잃은 상태인지를 나타내는 값인데, 전해질이 최적 상태(V3.5+)로 변해가는 중간 단계에서 평균 산화수가 약 +4.1이 되는 지점이 바로 반응이 급격히 느려지는 병목 구간이었다. 어느 구간이 전체 생산 속도를 좌우하는지가 그동안 명확하지 않았는데, 이를 산화수 수준에서 정밀하게 짚어낸 것이다.

이 발견이 중요한 이유는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전체 공정을 통째로 바꾸는 대신, 실제로 시간을 잡아먹는 병목 구간만 겨냥해 개선하면 된다는 방향이 잡힌 것이다. 문제의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해법 설계의 출발점이 됐다.

정체 구간만 우회한다

연구팀의 해법은 병목 구간에서 ‘더 빠른 우회로’를 쓰는 것이었다. 평균 산화수 +4.1 지점부터는 시간이 오래 걸리던 기존의 전기화학적 환원 대신, 백금-탄소(Pt/C) 촉매를 이용한 ‘촉매 환원’ 공정으로 전환하도록 생산 공정을 재설계했다. 촉매는 화학 반응 속도를 높여주는 물질로, 반응이 느려지는 구간에서도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다. 정체된 도로에서 우회도로로 빠지듯, 가장 오래 걸리던 마지막 공정만 효율적인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관건은 촉매의 내구성이었다. Pt/C 촉매는 반응성이 강한 전해액 환경에서 탄소 지지체가 부식되거나 백금 입자가 뭉치면서 성능이 떨어질 수 있다. 연구팀은 이 촉매가 손상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산화수 범위를 열역학적으로 분석해 규명했다. 촉매를 언제부터 투입해야 성능을 해치지 않으면서 반응을 앞당길 수 있는지, 그 전환 시점을 과학적으로 정한 것이다.

성과는 여러 지표로 확인됐다. V3.5+ 전해질의 생산 시간이 기존보다 67% 단축됐고, 공정 중 남아 배터리 성능을 떨어뜨릴 수 있는 불순물(잔류 옥살산)도 함께 제거됐다. 특히 같은 촉매를 2,500회 이상 반복해 써도 성능 저하 없이 전해질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음을 확인해, 실제 산업 현장에서의 활용 가능성을 입증했다. 촉매가 열화되면 반응 속도가 느려지고 이것이 곧 생산 시간 지연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착안해, 이를 검증하는 평가법까지 새로 만들었다.

실용화 관점에서 이 공정의 강점은 ‘바로 적용 가능하다’는 데 있다. 새로운 설비를 짓거나 특수한 소재를 합성할 필요 없이, 이미 상용화된 Pt/C 촉매를 그대로 써서 기존 바나듐 전해질 생산 라인에 직접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설비 교체 없이 생산 시간과 비용을 동시에 낮출 수 있어, 재생에너지 연계형 대용량 ESS의 전해질 공급 단가를 낮추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김희탁 교수는 “촉매가 전해액 환경에서 손상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조건을 과학적으로 규명해 산업 현장의 생산 병목을 해결한 만큼, 대용량 에너지저장 기술의 상용화를 크게 앞당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