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연, 많이 쓰는 플라스틱 나노입자가 폐에 염증 일으키는 원리 규명
생수병과 일회용 컵은 시간이 지나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잘게 부서진다. 이 나노플라스틱은 공기 중을 떠돌다 숨과 함께 폐 깊숙이 파고든다. 그 조각이 폐 안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가 밝혀졌다.
일상에서 가장 흔한 플라스틱 2종의 나노입자가 폐에 염증을 일으키는 원리가 규명됐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생명연) 환경질환연구센터 정진영 박사 연구팀은 동아대 조완섭 교수팀과 공동으로, 폴리에틸렌(PE)과 폴리프로필렌(PP) 나노입자가 호흡기를 통해 폐 깊숙이 침투했을 때 유발하는 폐 독성과 분자 수준의 염증 반응 기전을 정밀 비교·규명했다고 29일 밝혔다.
나노플라스틱(머리카락 굵기의 수만 분의 1보다 작은 플라스틱 조각)은 코나 기관지에서 걸러지지 않고 폐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다. 그동안 관련 연구는 실험용 입자를 구하기 쉬운 폴리스타이렌(PS)에 주로 쏠려, 정작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PE·PP가 폐에 미치는 영향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 결과는 국제 학술지 ‘Journal of Hazardous Materials Advances’ 9월 30일 온라인판에 게재됐다.
가장 많이 쓰는 플라스틱인데, 폐 영향은 몰랐다
연구의 출발점은 공백이다. 비닐봉지와 포장재, 생수병, 밀폐용기에 가장 널리 쓰이는 플라스틱이 바로 폴리에틸렌과 폴리프로필렌이다. 전 세계적으로 대량 생산·소비되는 만큼, 자연에 유출돼 나노플라스틱 오염을 일으키는 가장 주된 원인 물질이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이 두 소재가 폐에 미치는 영향은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나노플라스틱의 생체 영향을 알아보는 기존 연구는 실험용 입자를 구하기 쉬운 폴리스타이렌(PS)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실제 환경에 가장 많은 재질이 연구에서는 빠져 있었던 셈이다.
연구팀은 이 공백을 직접 메웠다. PE와 PP의 나노플라스틱을 직접 제작하고, 이를 디젤 연소 매연과 비교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가장 흔한 플라스틱 두 종류를, 대표적인 대기 유해물질인 디젤 매연과 같은 조건에서 견준 것이다.
폐 ‘청소부’ 세포가 뿜어낸 활성산소가 염증 일으켰다
실험 결과, 두 플라스틱 모두 호흡기를 통해 폐로 들어갔을 때 급성 폐 염증을 일으켰다. 비교 기준에 따라 그 세기는 더 두드러졌다. 물질의 무게를 기준으로 보면 폴리에틸렌이 디젤 매연 입자보다 더 강한 염증을 일으켰고, 입자가 몸에 닿는 실질적인 면적을 기준으로 보면 PE와 PP 모두 디젤 입자보다 훨씬 강력한 염증 유발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 확인됐다.
염증이 생기는 과정도 분자 수준에서 드러났다. 나노플라스틱이 폐에 들어오면, 폐를 지키는 ‘청소부’ 역할의 면역세포인 폐포 대식세포(폐포에 상주하며 이물질을 삼켜 제거하는 1차 면역 세포) 안에서 유해한 활성산소(ROS, 과도하게 쌓이면 세포막과 DNA를 공격해 염증과 세포 손상을 일으키는 반응성 높은 산소 화합물)가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이 활성산소가 주변의 면역세포를 끊임없이 불러 모으고 폐 조직에 상처를 입히며 심한 염증을 일으키는 주범임을 확인했다.
유전자 차원의 변화도 포착됐다. 연구팀은 유전자 분석을 통해, 플라스틱이 몸속에 들어오면 면역 조절과 염증을 담당하는 유전자들의 활동에 변화가 생긴다는 점도 확인했다. 폐를 지켜야 할 면역세포가 오히려 염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경로를 짚어낸 것이다.
‘무게’가 아니라 ‘표면적’…바뀌어야 할 안전 기준
이 연구가 던지는 메시지는 규제의 잣대로 향한다. 현재의 미세먼지·대기질 규제는 오직 ‘질량(무게)’ 중심의 기준에 머물러 있다. 문제는 가볍지만 표면적이 넓은 나노플라스틱의 위험을, 무게만으로 재면 실제보다 크게 낮춰 평가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이번 실험이 그 허점을 드러냈다. 무게로 재든 표면적으로 재든 나노플라스틱의 염증 유발력은 디젤 매연에 견줄 만했고, 특히 표면적 기준으로는 디젤보다 훨씬 강했다. 가벼워서 무게로는 작아 보이는 입자가, 넓은 표면으로는 더 큰 위험을 안고 있다는 뜻이다.
연구팀은 이를 새로운 기준의 근거로 제시했다. 정진영 박사는 “이번 연구는 일상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폴리에틸렌과 폴리프로필렌의 나노입자가 호흡으로 폐에 유입됐을 때 활성산소 생성과 표면 반응성을 중심으로 폐 염증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며 “기존의 질량 기준 대기 유해물질 평가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노입자의 특성을 고려한 보다 입체적인 환경·보건 기준을 마련하는 데 유용한 과학적 근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동아대 배은솔 연구원이 제1저자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