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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ST, 유기 반도체만으로 논리 회로 제작 성공…휘어지는 전자기기 상용화 뒷받침

유기 반도체 잉크로 그린 회로를 더 미세하고 반듯하게 굳혀주는 새로운 접착 물질이 나왔다. 휘어지는 디스플레이와 웨어러블 기기의 회로 공정을 단순하게 만들 기술이다.

유기 반도체 회로를 만들 때 원하는 부분만 빛으로 굳혀 모양을 잡아주는 ‘분자 접착제’를, 재료와 더 잘 섞이도록 새로 설계한 기술이다.

UNIST는 화학과 김봉수 교수팀이 연세대학교 조정호 교수팀과 공동으로 유기 반도체 고분자와 잘 섞이면서 고분자 사슬을 효율적으로 연결해주는 새로운 광가교제 ‘Diazo-6Bx’를 개발했다고 2일 밝혔다.

연구팀은 이 물질로 회로 선폭이 설계값에서 벗어나는 정도를 기존의 약 4분의 1로 줄이고, 소자 성능을 떨어뜨리던 결함까지 억제했다. 나아가 84개의 트랜지스터로 이뤄진 회로 배열과 기본 논리 회로를 만드는 데까지 성공해, 휘어지고 늘어나는 차세대 전자소자의 생산 공정을 단순화할 길을 제시했다. 관련 논문은 국제 학술지 에이씨에스 나노(ACS Nano)에 게재됐다.

새로운 층을 쌓을 때마다 무너지던 회로, ‘빛으로 굳히는’ 방식으로 해결

가볍고 휘어지는 유기 전자소자는 웨어러블·플렉서블 기기의 핵심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성능을 높이려면 회로를 여러 층으로 촘촘하게 쌓아 올려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새 층을 바를 때 쓰는 용매가, 이미 만들어 둔 아래층 회로를 녹여 망가뜨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세한 다층 회로를 안정적으로 만들기가 어려웠다.

해법으로 쓰여 온 것이 광가교제(photo-crosslinker, 자외선을 받으면 활성화돼 고분자 사슬끼리 단단히 연결시켜 주는 물질)를 이용한 ‘직접 광 패터닝’이다. 유기 반도체 잉크에 이 물질을 섞어 기판에 바른 뒤 회로 모양대로 자외선을 쬐면, 빛을 받은 부분만 단단하게 굳는다. 이후 용매로 씻어내면 굳지 않은 나머지는 흘러 나가고 빛을 쬔 부분만 회로로 남는다. 굳은 부분은 다음 층을 쌓을 때 용매에 녹지 않아, 층을 안정적으로 올릴 수 있다.

문제는 지금까지 가장 널리 쓰인 가교제가 유기 반도체와 잘 섞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존 광가교제인 6Bx는 플루오린(불소)이 많이 붙은 형태여서, 플루오린이 없는 탄화수소 기반 유기 반도체와 섞였을 때 서로 겉돌았다. 그 결과 가교제가 한곳에 뭉치거나 고르지 않게 퍼져, 회로 가장자리가 씻겨 나갈 때 깎이고 경계가 흐릿해지기 쉬웠다.

연구진이 개발한 광가교제의 구조와 대면적 유기 트랜지스터 논리회로 어레이 공정 모식도

플루오린을 걷어내 ‘잘 섞이는’ 접착제로…선폭 편차 4분의 1로

연구팀은 기존 가교제의 화학 구조를 바꾸는 방식으로 이 한계를 풀었다. 6Bx에서 반응을 담당하던 부분인 ‘테트라플루오로페닐 아지드기’를, 플루오린이 없는 ‘페닐 다이아조 에스터기’로 교체한 것이다. 이렇게 만든 새 광가교제가 Diazo-6Bx다. 플루오린을 걷어낸 덕분에 이 물질은 탄화수소 계열 유기 반도체와 잘 섞여 필름 안에 고르게 퍼진다.

작동 원리도 바뀌었다. 새 가교제의 다이아조기(diazo, 질소 원자 두 개가 붙은 화학 구조)는 자외선을 받으면 반응성이 매우 높은 카벤(carbene, 자외선을 받아 만들어지는 활성 상태의 탄소 화합물)으로 바뀐다. 이 카벤이 고분자의 탄소-수소 결합 사이로 파고들어, 사슬들을 3차원 그물망 형태로 촘촘하게 엮는다. 반면 기존 아지드 기반 가교제는 자외선을 받으면 나이트렌(nitrene)으로 바뀌면서 질소-수소(N-H) 결합을 남기는데, 이 결합이 소자 성능을 갉아먹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성능 개선은 수치로 확인됐다. 새 가교제를 넣어 직선을 그린 결과, 설계한 선폭에서 벗어나는 정도인 선폭 편차가 기존 10.3마이크로미터(㎛, 100만분의 1미터)에서 2.5㎛로 약 4분의 1 수준까지 줄었다. 회로 가장자리의 각도도 67.9도에서 수직에 가까운 87도로 높아져, 경계가 한층 또렷해졌다. 회로를 얼마나 설계도에 가깝게 구현했는지를 뜻하는 패턴 충실도가 크게 향상된 것이다.

소자 안정성까지 잡고 논리 회로 제작 성공…생산 공정 단순화 기대

새 가교제는 회로의 정밀도뿐 아니라 소자의 작동 안정성도 끌어올렸다. 전하 흐름을 방해하는 ‘트랩'(회로 내부 물질의 결함 등으로 전하 흐름이 가로막히는 현상)이 줄어든 덕분이다. 연구팀이 트랜지스터에 4,000초 동안 일정한 전압을 가한 뒤에도, 새 가교제를 쓴 소자는 기존 가교제를 쓴 소자보다 전류 감소와 문턱전압 변화가 작았다. 전기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결합이 생기지 않아, 가교 후에도 성능 저하 없이 안정적으로 작동한 것이다.

특히 이 물질은 p형과 n형 반도체를 하나의 용매로 연속 패터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연구팀은 이 기술로 p형과 n형 고분자 반도체를 모두 패턴화했고, 이를 바탕으로 기판 위에 84개의 트랜지스터 소자로 구성된 유기 박막 트랜지스터(OTFT, 실리콘 대신 유기물 반도체를 채널로 쓰는 트랜지스터로 유연하고 가벼운 소자를 만들 수 있다) 배열을 구현했다. 나아가 NOT·NAND·NOR 게이트 같은 상보형 논리 회로(참·거짓 두 값으로 논리 연산을 수행하는 전자회로)를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다.

김봉수 교수는 “이번 광가교제는 유기 반도체 회로를 더 미세하고 균일하게 만들면서도 소자의 작동 안정성을 높일 수 있는 물질”이라며 “같은 용매로 p형과 n형 반도체를 연속해서 패터닝할 수 있어 용매 선택과 공정 설계의 부담을 줄이고, 대면적 유연 디스플레이와 웨어러블 전자기기의 생산 공정을 단순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